먼 곳에 있는 그대, 보고 싶었다. 항상 잊지 못하고 끊임없이 되뇌던 당신의 이름, 발칸. 보스니아와 몬테네그로 그리고 세르비아에서 보냈던 꿈같고 때론 여운 깊은 영화와 같았던 기억들. 이제 잡지 못하고 놓지도 못한 채 그 속에서 흘러간 집시의 시간을 추억할 때. 잊힌 기억을 추억으로 바꾸는 방법, 발칸.

 
세르비아

발칸의 역사에서 항상 중심에 섰던 나라. 세르비아.

다른 국가들과 유달리 서유럽의 색채가 강하지만 도나우 강이 흐르고 발칸 산맥이 이 땅을 지나며 무엇보다 발칸 땅 파노니안 평원의 한 가운데에 있으니 세르비아를 어찌 진정한 발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하얀 도시, 베오그라드
하얀 도시라는 같은 이름을 지닌 도시는 많다. 페루의 아레끼빠, 모로코의 테투안 그리고 대부분의 스페인 남부 도시들. 베오그라드가 주는 흰색의 이미지가 궁금했다. 발칸에서 흰색이라… 우선 베오그라드를 걸을 수밖에. 동유럽에서 가장 먼저 맥도널드가 들어오고 일찌감치 나이트클럽과 펍이 거리 어느 곳에나 있을 정도로 서구 문명을 일찌감치 이식한 나라,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거리를 걷다 보면 서유럽의 어느 도시에 있는 것처럼 활기와 분주함이 가득하다.
         베오그라드의 도심은 보스니아나 몬테네그로의 중심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고 주변은 화려했으며 다양한 브랜드의 상점은 확실히 서유럽의 모습이었다. 이들에게서는 확실히 부유함이 느껴졌다. 없는 자가 억지로 내는 것 말고 원래부터 있던 태생적 여유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나오는 자유.
         17세기에 조성돼 구시가지라고 불리지만 아무래도 화려한 현대식 거리인 크네즈 미하일로바 거리를 끝까지 걸으면 칼레메그단 성벽과 만난다. 칼레메그단은 ‘넓은 평원의 요새’라는 뜻으로 20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 베오그라드를 꽤 오랫동안 지켜주었던 곳이다.
         군사적 용어인 요새에 서 지금은 베오그라드 시민들의 휴식처인 공원으로 용도 변경된 칼레메그단. 도나우 강과 사바 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언덕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베오그라드 시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요새 끝에는 기념비가 하나 서 있는데 바로 베오그라드의 상징인 ‘승전기념비’. 14m 높이의 이 상은 한 손에 검을, 다른 손에는 비둘기를 들고 있다.
         이 땅에서 전쟁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바람. 베오그라드가 주는 흰색은 결국 평화의 색이었다. 동상 너머 도나우 강이 펼쳐지면 어느덧 당신과 나의 거리만큼 멀게만 느껴졌던 베오그라드가 성큼 다가오는 순간. 이제 우리는 어느덧 다시 가까워졌다.
 
        세르비아 횡단 열차, 모크라 고라

비타시 마을에서 모크라 고라 마을까지 이어지는 협궤열차. 과거에는 보스니아까지 국경을 넘어 달리던 발칸 횡단 열차였으나 보스니아 내전 때 파괴돼 중단됐다가 현재 지역 주민들의 노력으로 일부 구간이 재개통돼 관광열차로 운행되고 있다.
        하늘에서 보면 열차 레일의 궤적이 숫자 8처럼 보인다고 해서 사르간 에잇이라고도 부르는 모크라 고라. 모크라 고라는 ‘젖은 산’이라는 뜻이다. 열차는 마을을 떠나 곧장 산속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아직 채 떨어지지 않은 단풍과 구석에 얼어 있는 얼음덩이를 지나며 남서쪽으로 달린다. 경북 봉화에서 강원도의 태백까지 외진 산간을 달리는 눈꽃 열차와 거의 흡사한 느낌. 그때도 좋았으니 같은 상황이라면 지금도 좋지 않을 이유가 없다.
        마침 세르비아의 한 고교에서 수학여행을 온 탓에 열차 안은 뜻하지 않게 소란스러웠다. 옆자리의 승객은 이스라엘에서 온 노부부. 여 행자들과 학생이라는, 낯선 시선과 익숙지 않은 환경은 금세 밝은 분위기로 바뀌고 이내 고등학생들은 그들만의 나이로 돌아가, 내부는 기차가 달리는 속도만큼 빠르게 변했다. 간단한 영어 몇 마디만으로도 충분했던 세르비아 고교생들과의 한 때. 
        서로 악수를 하고 헤어질 때, 묘한 감정이 스미고 그것은 바로 기차가 가지고 있는 정서와 맞닿는다. ‘8’, 돌고 돌아 다시 만나는 모든 것들. 그들과 나,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그리고 나와 발칸.
 
집시의 시간, 드르벤그라드

영화 ‘집시의 시간’ 보스니아 출신의 감독 에밀 쿠스트리 차가 빚어낸 이 영화는 예전 유고 땅에서 흘러간 발칸 사람들의 애환과 사랑을 그린 영화로 1989년 칸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쿠스트리차는 사라예보의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개종 후 세르비아로 건너갔고 ‘사랑은 기적’이라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이 영화적 공간인 드르벤그라드를 지었다.

보스니아를 여행하다가 만난 한 보스니안은 자신의 땅에서 나고 자란 쿠스트리차가 자신들에게 총을 겨누었던 세르비아로 넘어가 살고 있는 것에 대해 조금은 쓸쓸한 얼굴을 가로저었다. ‘나무로 지어진 마을’이라는 뜻의 드르벤그라드. 우든 타운이라고도 불리며 영화가 철수한 이후에는 퀴스텐도르프라는 이름의 리조트로도 운영되고 있지만 쿠스트리차는 이곳이 자신의 삶과 영화가 완성되는 곳이라며 최초의 형태를 유지시키고 있다.

거리에는 페데리코 펠리니와 잉그마르 베르히만, 압바스 키에로스타미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장들의 이름이 부여됐으며 얼마 전 타계한 스탠리 큐브릭의 이름을 붙인 영화관도 있다.

드르벤그라드에서는 2008년 이후 매년 퀴스텐도르프 영화제와 뮤직 페스티벌을 열고 있는데 레드 카펫을 깔지 않고 할리우드에서 나오는 영화 소품을 전혀 쓰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우든 타운 중심에 역시 세르비아 정교회의 성인인 성 사바의 이름을 붙인 자그마한 성당이 있다.
 
오플레나츠 교회

베오그라드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여. 성 조지 교회는 세르비아 전체를 통틀어서, 아니 어쩌면 전 유럽의 유수 교회나 유명한 성당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 지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플레 나츠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 이 교회는 1910년에 세워졌으며 세르비아의 국보격인 ‘Cultural Monuments of Exceptional Importance’로 지정돼 국가적 보호를 받고 있다. 대대로 세르비아를 이끌었던 로열패밀리 가문의 영묘로도 쓰이고 있는 이 교회는 토폴라 마을 언덕 정상 한적한 나무숲을 따라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단순한 회백색의 외관에 평범한 다섯 개의 푸른 돔을 이고 단정하게 서 있는 오플레나츠. 수수하고 말쑥한 차림은 우선 왕가의 이미지와는 조금 멀다. 작게 열린 교회의 나무문으로 들어서면 이제 한적한 나무숲을 통과하고 언덕에 올라 갑자기 나타난 마법의 세계로 들어온 셈. 내부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성화와 갖가지 조명으로 음영을 달리하는 모자이크 타일은 이곳이 잠시 세르비아가 아닌 완전히 다른 장소로 옮겨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모자이크는 빛을 받아 색을 입고 또 그 색을 다시 반사해 다른 모자이크에 다각도로 영향을 끼친다. 빛의 난반사, 이 빛의 아름답고 어지러운 난투에 잠시 왕가의 무덤이라는 생각이 사라진다. 화려한 모자이크 극장은 지하까지 이어지고 이토록 신비한 아름다움 속이라면 기꺼이 이곳에 갇혀도 좋겠다는 환상마저 드는 곳. 분명한 것은 발칸의 최고 지점은 바로 이곳이라는 점이다.
 
밀레세바 수도원

밀레세바 강이 조심스럽게 흐르고 있는, 몬테네그로 국경과 불과 25킬로미터 떨어진 곳. 모든 세르비아 정교인들에게 절대적으로 성스러운 장소여서 정신적 중심지로 여기는 밀레세바 수도원이 있다.

베오그라드 시내 중심에 있는 성 사바 성당 의 주인공인 성 사바의 유해가 최초로 안치되었던 곳. 중앙에 위치한 수도원 본당 내부에는 세르비아의 국보로 여겨지는 두 가지 미술품, 예수의 관에 앉아 있는 ‘White Angel’과 성 사바의 생애가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있지만 아쉽게도 내부 사정으로 보지는 못했다. 내부는 엄격하게 사진 촬영을 제한하고 있다.
 
고요한 도시, 노비 사드

노비 사드. 헝가리와 인접한 이유로 많은 헝가리안들이 살고 있으며 몬테네그로가 독립하기 전 몬테네그로 공화국일 당시 역시 헝가리계의 보이보디나 자치공화국이었던 곳이다, 세르비아의 두 번째 도시로 베오그라드보다 삶의 질이 부유하다고 평가받는 도시.
     베오그라드가 세련되고 남성적이며 빠르게 분주하다면 노비 사드는 우아하고 여성적이며 분주하지만 속도감은 느리다. 그래서 세르비아 사람들은 노비 사드를 고요한 도시라고 부른다.
     노비 사드의 중심지인 슬로보데 광장은 베오그라드보다 훨씬 유럽적이고 시청과 세르비아 정교회 그리고 가톨릭계인 성 마리아 성당과 유대인 시나고그 등 많은 종교적 건축물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부터 여러 갈래 골목으로 이어진 노비 사드 속을 걷는 것이야말로 노비 사드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발칸이 조금은 위험하지 않을까 우려했던 모든 이들에게 이곳처럼 안전한 곳이 어디 있냐고 되묻고 싶은 공간이다.
     베오그라드의 칼레메그단과 마찬가지로 노비 사드 역시 요새가 도시를 지켜주고 있는데 페트로바라딘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 전 유럽에 남아 있는 가장 크고 완벽한 요새 체계로 이곳을 기준으로 도나우강이 양옆으로 흐르고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뉜다.
     다리를 건너 강 아래에서 바라다보면 아름다운 풍광으로 마치 요새가 물 위에 떠 있는 섬처럼 보인다. 지중해의 이베리아 반도 끝에 있으며 아름다운 암벽으로 유명한 영국령, 지브롤터. 페트로바라딘은 발칸의 지브롤터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다.

매년 페트로바라딘에서 개최되는 EXIT Music Festival은 유럽 전체에서 가장 열광적인 음악 축제로 이 시기 노비 사드에는 세상 어느 곳보다 많은 사람이 몰린다. 고요한 도시와 더불어 이곳을 문화의 도시라고 부르는 이유다.
 
교육과 와인의 도시,
스렘스키 카를로브시

다시 베오그라드로 돌아오는 중간 즈음, 바로크 타운이라 불리는 스렘스키 카를로브시 도시에 들린다.

마을 한가운데의 건물은 세르비아 정교회 건물로 카를로브시는 정교회 업무가 베오그라드로 이관되기 전까지 많은 부분에서 정교회를 대표했던 도시였다. 그리 크지 않은 타운에는 1792년에 세르비아에 최초로 세워진 김나지움이 있는데 바로크 타운과 더불어 카를로브시를 교육의 도시로 부르는 까닭이다.
    5개국의 언어는 기본이며, 많을 경우 무려 8개국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하는 이 학교의 학생들. 세르비아의, 발칸에서의 저력이란 이런 곳에서 나오는 것일 터다. 카를로브 시에 들리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주변에 많은 와이너리가 있다는 것.
타운 거리에는 누구나 와인을 받아갈 수 있게 시민용 와인 드럼통이 있을 정도다. 한때 이 백여개의 와인 생산지가 있었고 지금은 50여 개로 줄어들었지만, 한때 세르비아의 와인과 세르비아 정교회를 책임졌던 카를로브시. 어쩌면 노비 사드보다 더 고요한 도시.
 
비밀의 수도원, 노보 호포보
세르비아 북부의 거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거대한 프루스카 고라 산맥 아래에 있는 정교회 수도원. 세워진 시기는 불분명하며 본당 내부에 수백 년 동안 보존되고 있는 프레스코화로 유명하다.

세르비아 국보 중 하나로 관리되므로 내부의 사진 촬영은 금물이다. 본당 구석에 다른 프레스코 성화들과는 이질적인 특이한 그림이 하나 있다. 미술 역사상 가장 독특한 화풍과 베일에 싸인 화가 중 한 사람으로 간주되는 히로니뮈스 보스와 유사한 화풍의 벽화가 그것이다. 네덜란드인인 그가 언제 이 먼 곳까지 와서 몰래 그림을 그리고 갔을까 하는 의문은 김홍도가 홀연히 사라진 후 일본으로 건너갔던 것과 비틀스가 몰래 캐나다로 넘어가 역시 의문의 클라투라는 밴드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연결되는 신기함으로 이어진다.
 
<사진=여행매거진 GO-ON 제공>
발칸 대표 음료
 
발칸의 전통주 라끼아(RAKIA)
발칸 지역의 전통주인 라끼아는 곡주이자 무색의 백주로 파인애플과 모과, 자두와 청포도 등 다양한 과실로 만들어진다. 도수가 높지만 뒷맛이 깔끔하고 소화력이 좋아 발칸 사람들이 사랑하는 대표적인 술로 통한다. 레스토랑 어느 곳에서도 주문이 가능하다.


 
보스니아의 생수 오아자(OAZA)
깨끗하고 맑은 물이 넘치는 보스니아에서는 물을 맛보는 것도 꼭 해야 할 일, 보스니아를 대표하는 단순한 생수지만 그 청량감과 시원함은 잊을 수 없다. 백악관에 납품되는 생수라니. 그것으로 설명은 끝.



 
세르비아 와인
세르비아는 유럽 와인 강국 중 하나이다. 스렘스키 카를로부시가 대표적인 와이너리 밀집 지역으로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지역의 골목골목은 부티크 와이너리와 와인을 빚는 수도원으로 넘쳤다고 한다. 세르비아 출신으로 세계 최고의 테니스 스타인 조코비치가 세르비아 와인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라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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