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美우드로윌슨센터 루마니아 외교문서 공개
남북대화에 남한 내 야당·시민단체 참여 유도…결국 北계획 실패

 
북한(北韓)이 1972년 7월 4일 발표된 남북공동성명(이하 7.4성명)으로 상징되는 남북대화를 통해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기반을 흔들어 야당 진영의 집권을 도우려 했음을 입증하는 외교문서가 지난 2012년 공개됐다.

미국 우드로윌슨센터 ‘북한국제문서연구사업’(NKIDP) 프로젝트팀이 북한대학원대학교와 공동으로 발굴한 1970년대 남북 7.4성명 이후 상황을 담은 루마니아 외교문서에는 당시 북한이 남북대화를 추진한 속셈과 국제사회를 상대로 남한 정부를 고립시키려 했던 이른바 ‘평화·선전공세’의 진면목이 잘 드러난다.

당시 필자는 총 25건에 달하는 외교문서를 입수해 분석했다. 1973년 3월 8일자 루마니아 외교문서를 보면, 당시 니콜라이 차우세스쿠를 예방한 김동규 북한노동당 비서는 북한이 1971년부터 강화한 ‘대화공세’에 대해 설명한다. 김동규는 “남측과의 대화를 통해 남한 대중들에 혁명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서 “아울러 남한 괴뢰도당을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고, 혼란상항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의 평화공세가 이룩한 또 다른 큰 성과는 남한에 미군이 주둔할 어떤 명분도 없다는 점을 알릴 수 있었다는 것”이라며 1972년 7월 4일 밝힌 공동성명에서 “우리가 남한을 침공할 의사가 없음을 선언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7.4 공동성명은 ‘남북의 통일은 외세의 간섭없이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족대단결의 원칙으로 이뤄야 한다’고 천명했다.

김동규는 남북대화를 통해 중요한 승리를 거뒀다고 자평한 뒤 “남한 혁명운동가들이 지하에서 그들의 활동을 전개해나갈 때 솔직히 현재의 상황은 (대화) 이전에 비해 매우 우호적”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김동규는 남북공동조절위와 남북적십자대화 등의 대화 채널에 남한의 노동자, 농민, 학생, 지식인, 야당세력 등 북한에 동정적인 세력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동규가 차우세스쿠에게 한 발언들은 ▲남북대화를 통해 남한 내 혁명을 조장하고 ▲이른바 남한 혁명 이후 민주적 지도자가 등장하면 북한과의 평화적 통일을 추진한다는 북한의 전략을 종합한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북한은 7.4성명 이후 박정희 정권이 선포한 1972년 ‘10월 유신체제’로 인해 전략에 차질을 빚게 된다.

1973년 3월 1일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본국에 보고한 전문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가 출범한 이후 “북한은 유일한 대화 파트너만을 상대해야 했는데, 바로 박정희를 의미한다”고 돼 있다. 박정희 정권이 야당의 남북대화 참여를 허용하지 않는 상황에 직면한 북한은 몇 가지 다른 전술을 구사한다.

1973년 3월 9일과 17일 평양주재 루마니아 대사관 보고 전문을 보면, 북한은 1973년 3월 평양에서 개최된 2차 남북조절위원회에서 “한반도의 군사적 사안을 다른 어떤 안건보다 먼저 해결하자”고 요구한다. 전문(17일자)은 “북한은 특히 남북 상호 군축을 위한 5개항을 제안했다”고 소개했다. 5개항은 남북 모두 병력규모를 10만명 이하로 줄이고, 외국군의 무기의 반입을 중단하고, 한반도에서의 외국군 철수 등을 골자로 한다.

북한은 이어 7.4 공동성명 1주년이 되는 1973년 여름이 되자 남한에 대한 공격을 더욱 노골적으로 전개한다. 특히 유엔 동시가입을 추진한 남한에 대해 “한반도 분단을 고착시키고 있다”고 맹비난했다고 그해 6월 23일자 루마니아 대사관 전문은 전한다.
아울러 북한은 자신들의 대화공세 전술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음을 알고는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직접 체결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한다.

한 대학교수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호응하지 않아 북한의 시도는 물론 실패하게 된다”면서 “특히 박정희 정권이 남북대화 채널을 독점해 대화 구도를 북한 측에 유리하게 만들려던 구상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미국은 북한이 주창한 평화협정 제안을 애초부터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시기적으로는 1976년 8월 발생한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이 남북관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975년 11월 유엔 총회에서 자신들의 생각이 담긴 공산권의 결의안이 통과되자 북한은 유엔은 물론 비동맹 세계에서 박정희 정권을 고립시키기 위해 대화 공세를 전개했으나 1976년 8월 판문점도끼만행 사건으로 모든 것이 무산된 것이다.
결국 판문점도끼만행 사건으로 한반도 데탕트는 종식됐다.

한편, 북한은 7·4 남북공동성명 44주년을 맞은 지난해 7월 4일 미국과 우리 정부가 자주통일에 대한 민족 지향에 도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이날 7·4 공동성명 관련 논설에서 “김정은 동지께서는 조선로동당 제7차대회에서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가장 정확한 노선과 방침을 제시하였다”면서 “통일강국을 일떠세우기 위한 우리 겨레의 투쟁에서 새로운 전환적 계기를 열어놓은 역사적 사변으로 된다”고 선전했다.

그러면서 신문은 “오늘 조국통일운동의 전진을 달가와하지 않는 미국과 남조선통치배들은 북남관계 개선과 자주통일에 대한 우리 민족의 지향과 요구에 악랄하게 도전하면서 반공화국 ‘제재’와 북침 핵전쟁 도발 책동에 피눈이 되여 날뛰고 있다”고 비난했다. 북한은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줄곧 7·4공동성명을 6·15공동선언과 10·4선언과 함께 통일강령으로 삼아 남북관계 개선에 나설 것을 우리 측에 촉구했다.

이날 조선중앙방송은 7·4 공동성명 44주년 김일성대 교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역사적인 7·4공동성명의 발표는 우리민족의 조국통일의 앞길에 밝은 전망을 열어준 전환적 계기”라며 “조국통일 3대헌장을 일관하게 틀어쥐고 통일의 앞길을 열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대남 선전용 매체 ‘우리민족끼리’는 “조국통일 3대원칙은 통일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접수될 수 있는 가장 공명정대한 것이였다”며 “북과 남이 서로 불신과 대결을 지속한다면 전쟁밖에 차례질 것이 없다”고 공세를 폈다.

또 북한 인터넷 선전매체 ‘메아리’는 “현 남조선당국은 통일원칙을 전면거부하고 있으며 통일과 화해, 협력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종북’이라고 하며 탄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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