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가운데) <사진=정대웅 기자>
[일요서울|장휘경 기자] 민주당 호남 경선에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60.2%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중도·보수 표심을 잡기 위한 ‘반문(反 문재인)연대’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더불어민주당 탈당 뒤 여야 인사들을 꾸준히 만나왔다. 정치권은 그가 개헌과 반문을 고리로 한 빅 텐트를 치려는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2012년 대통령 당선에 1등 공신으로 기여했고 제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을 이끈 바 있는 김종인 전 대표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시기인 만큼 그가 걸어온 정치적 행보에 세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올해 나이 78세인 김 전 대표는 우리나라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의 손자이며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김재열의 외아들이다. 조부인 김병로는 일제치하 독립투사들의 변호를 맡았던 독립운동가이며 해방 후 사법부의 독립을 위해 이승만에 맞섰던 인물이다.

김 전 대표는 1959년 서울 중앙고등학교를 거쳐 196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를 졸업했다.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통합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김병로의 비서 역할을 하면서 일찌감치 정치 현실을 관찰했다.

박정희 정부 때 정책자문 역할 맡아

김병로 대법원장이 별세한 후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가 귀국 후 1973년 3월, 34세의 나이로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교수가 된 김 전 대표는 박정희 정부 때 정책자문 역할을 맡아 서강대 교수를 그만두고 경제개발계획 수립에 참여했다. 경제사회개발 5개년 계획 입안에 참여하면서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이었던 신현확의 반대를 무릅쓰고 의료보험제도를 최초로 도입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1979년 유신정권 붕괴 후에는 신군부가 통치권을 확립하기 위해 설치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한 것을 계기로 민주정의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그 후 1981년부터 1988년까지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1대, 제12대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냈고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낙선해 1989년 1월부터 7월까지 국민은행 이사장을 지냈다.

1989년 7월부터 1990년 3월까지는 제24대 보건사회부 장관을 역임했고, 1990년 3월부터 1992년 3월까지 2년간 청와대 경제수석을 역임했다.

청와대 경제수석을 그만둔 후 1992년 제14대 국회에서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전국구 국회의원이 됐으나 1993년에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형을 받았다.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재직 중이던 1991년 12월 청와대로 찾아온 동화은행 안영모 행장으로부터 “은행장 연임이 가능하도록 도와달라”는 부탁과 함께 1000만 원을 받는 등 1992년 3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2억1000만 원을 받은 혐의였다.

물론 김종인은 “안 행장으로부터 연구소 설립 목적으로 3억 원을 기부 받은 것 외에는 뇌물을 받은 사실이 없다”라고 주장했으나 검찰이 물증을 제시하자 곧바로 수뢰 사실을 시인했다. 그 후 김종인은 “당시 시대 상황에선 어쩔 수 없었으며 나는 6공 인물들 중에서는 가장 깨끗한 편”이라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오랜 기간 야인으로 있다가 2004년 3월에 새천년민주당에 영입됐다.

‘경제민주화’ 신념 흔들림 없어

지역구 없는 비례대표로만 5선을 한 국회의원, 김 전 대표는 40여년 전 강도 높은 재벌개혁 정책을 실행하면서 ‘경제민주화 전도사’로 꼽혔다. 그러나 신념을 관철한다는 이유로 수차례 당적을 바꾼 행보는 자주 도마에 오르며 정치적 철새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위임된 전권을 최대한 행사하며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다 보니 러시아 전제군주라는 뜻의 ‘차르’, ‘점령군 사령관’ 등의 별명도 따라 붙었다.

“헌법에 경제민주화 조항을 넣지 않으면 나중에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집니다. 대통령이 힘 센 거 같지만 나중에 재계의 힘이 세지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재계가 어떤 정책이 시장경제 논리에 반한다며 헌법재판소에 가져가면 언론이 누구 편을 들겠습니까? 광고에 의존하는 언론은 재계의 편을 들 것입니다. 여론 형성층이란 교수들도, 위헌 소송을 맡은 보수적 판사들도 결국 위헌이라는 결론을 낼 것입니다.”

김 전 대표는 2013년 10월 ‘종로포럼’에 초청받은 자리에서 1987년 헌법 개정 당시 경제민주화 조항(제119조 2항)을 넣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당시에도 재계의 반발이 거셌지만 이런 논리로 군부 정권을 설득했다는 것이다.

1987년 개헌 당시 경제민주화 조항을 직접 작성하고 관철시킨 김 전 대표는 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경제수석을 역임하면서 경제 구조 조정과 체질 개선을 주도했다. 또한 재벌과 기업의 폭주를 견제하는 등 균형 잡힌 경제적 성과를 이뤄내려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주로 보수 진영에서 핵심적인 경력을 쌓아왔던 인물이지만 경제민주화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념 때문에 진보 진영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아 2004년 새천년민주당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의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선 캠프는 진보층 표심과 중도층 표심을 공략할 목적으로 그를 영입해 경제민주화 공약 설계를 맡기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 말기 당시 경제력이 대기업들에게 집중된 반면 일반 국민들의 가계 부채는 폭증하고 있었다. 김 전 대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경제민주화라는 핵심 공약을 정립시켰고 이는 박근혜 캠프의 이미지 메이킹에 크게 기여했다. 박근혜는 이명박과 달리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보살필 것이고, 재벌들의 전횡에도 철퇴를 내릴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주었던 것.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경제민주화 공약이 사실상 폐기됐고, 김 전 대표는 ‘팽’ 당했다고 판단해 그들과 결별했다.

2012년 안철수의 경제 멘토 역할을 하는 ‘조언자’로도 유명했다. 김 전 대표는 안철수와 청춘콘서트의 게스트로 만나면서 인연을 맺게 됐다. 그때 김 전 대표는 안철수에게 ‘이런 올곧은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정치를 권했다고 한다. 하지만 곧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로 갈등이 생겨 결별했다. 당시 정치 초보였던 안철수에게 서울시장이라는 거대한 자리는 아직 버거울 테니 먼저 국회의원이 되어 정치 경험을 쌓는 게 좋겠다고 김 전 대표가 권유했다. 그러나 안철수는 ‘국회의원은 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 아니냐’고 말해 김 전 대표가 크게 실망하고 기대를 접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후 박근혜 당시 후보 캠프에 참여했다.

미국 및 독일 정·재계 인사들과 친분 두터워

박근혜와 결별한 이후에는 철저히 야인으로 지내다가 더불어민주당 대표이자 비상대책위원장 겸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추대돼 2016년 2월부터 더불어민주당의 수장으로 맹활약했다.

20대 총선에서 일여다야(一與多野) 구도였음에도 불구하고 더불어민주당이 새누리당 의석을 상회하며 승리하게끔 이끌어낸 양대 산맥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특히 20대 총선 때 ‘야권 통합론’으로 국민의당을 마비 직전까지 몰고감으로써 국민의당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공천 과정에서 정청래와 이해찬 컷오프와 비례대표 문제 그리고 ‘당 대 당 야권 연대’ 거부 방침 등으로 범야권뿐만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의 대다수로부터 많은 비토를 받은 바 있다.

또한 20대 총선 이후 더불어민주당 주류의 친문과 배치되는 의원내각제 또는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공개적으로 주장하면서 문재인 전 대표와 대립, 결국 지난 3월 8일 탈당계를 제출해 의원직이 상실됐다.

한편, 독일 뮌스터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김 전 대표는 미국, 독일의 주요 정치·경제계 인사들과의 친분이 두터운 인사로 알려졌다. 특히 레이건 행정부 초반까지 득세하고 지금도 헤리티지 재단이나 공화당에서 전통적 입지를 지키고 있는 고전 보수주의자들과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

독일의 경우에도 통독 전후의 서독 측 인사들과 지금까지 꾸준히 소통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미국에서 트럼프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다시 고전 보수주의자들이 부상함에 따라 앞으로 김 전 대표의 역할도 상당한 영향력이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장휘경 기자  hwikj@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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