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2007년, 美 CIA 비밀보고서 김일성 新군사모험주의 해부
1968년 1.21사태로 한미방위조약 보완 협의

 
지난 1968년 북한군 게릴라들의 청와대 기습 기도사건인 1.21사태와 뒤이은 미(美)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號) 납치사건은 북한 김일성(1994년 사망)의 새로운 군사적인 모험주의에 의해 시도됐다는 분석이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2007년 비밀기록물에서 해제한 극비 보고서에서 제기됐다. 또 김일성은 통일을 위해 대규모 무력침공보다는 게릴라에 의한 남한 내 거점확보를 통한 무장공격이나 대중봉기 등을 통한 장기적인 체제전복 전략을 추구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일성의 새로운 군사모험주의’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김일성이 미국과 직접적인 대규모 군사 충돌을 피하면서 베트남 전쟁으로 미국이 다른 지역에서 전쟁을 수행하기 힘들 것이라는 정세판단에 따라 한국의 비무장지대(DMZ)에서 군사적인 도발과 1.21 무장게릴라 청와대 습격사건을 기도했다고 분석했다.
 
김신조 등 31명의 무장게릴라들을 남한에 침투시켜 청와대를 기습하도록 한 것은 무력 도발 시도에 대한 북한 내부의 일부 반발을 무마하면서 남한의 전 지역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김일성의 강렬한 열망 때문이었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평양의 방송들도 이 사건을 처음에는 남한 내 무장게릴라들의 출현으로 언급했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이에 따라 보고서는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북한이 DMZ에서 한국군과 미군을 상대로 도발행위를 지속하면서 남한 정부관리 암살과 게릴라 거점확보, 남한공산당 조직 등 갖가지 임무를 부여한 게릴라를 침투시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일성은 4.19혁명과 5.16사태 등 1960년과 1961년 두 차례 걸쳐 남한 체제를 전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비록 놓쳤지만, 호찌민 베트남 주석이 남부 베트남에서 정치·군사기구를 만들었던 것처럼 한국에서 위기가 발생하면 이를 이용할 수 있는 공산당원을 훈련시키기를 분명히 원했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보고서는 또 1.21사태 직후에 북한이 저지른 1.23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은 김일성의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요소들에 근거한 정세 판단의 결과물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객관적으로는 김일성은 당시 미국이 푸에블로호 납치에 따른 보복 조치로 핵(核) 공격을 시도하지 못할 것이고, 재래식 보복 공격에서는 얼마든지 맞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판단이 있었다. 아울러 김일성은 소련 및 중국과의 방위조약 때문에 미국의 군사적인 행동이 억제되고 미국이 아시아에서 제2의 전쟁 개입을 꺼리고 있다는 믿음을 분명히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주관적으로는 김일성은 제국주의 적(敵)인 미국에 도전함으로써 우방인 소련과 중국을 압도하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었고 푸에블로호를 납치함으로써 미국에 맞서는 북한의 대담함을 소련과 중국의 신중한 모습과 극명하게 대비시키고 싶었다고 보고서는 진단했다. 이런 점에서 푸에블로호 납치와 DMZ에서 미군을 괴롭히는 것을 통해 김일성은 자신을 반미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전략가라고 여겼다는 것.
 
김일성이 1968년 10월 작은 나라도 미국을 모든 전선에서 격퇴할 수 있다는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호찌민 주석이 주장했던 것과 비슷한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고 보고서는 덧붙였다.
 
한편, 우리 정부는 1968년 1.21사태를 계기로 북한의 도발행위와 침략에 대해 한미가 즉각 행동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한미 방위조약을 보완하는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했다. 1968년 4월 4일 뉴질랜드 웰링턴에서 열린 회담에서 당시 최규하 외무장관은 딘 더스크 미국 국무장관에게 “한미 방위조약을 행정적으로 보완하는 문제를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 제의한 바 있다”고 밝혔다.
 
최 장관은 “그것은 한미 방위조약의 정신에 입각하여 북괴의 재침이 있을 경우 미국이 즉각 대응조치하겠다는 것을 성명 또는 기타 각서 등으로 부연하여 줄 것을 요청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더스크 장관은 “현재 검토 중에 있으니 추후 회신을 주겠다”고 답변했다.
 
정부는 앞서 그해 2월29일 북한의 침략적 도발 행위와 전면적 재침략에도 이를 즉각 격퇴하기 위해 한미 양국이 즉시 행동으로서 대응하겠다는 것을 행정적 문서로 보장해줄 것을 요청한 대미 ‘Aide-Memoire’(각서)를 전달했다. 즉 2월 29일 윌리엄 포터 주한 미 대사를 통해 이를 전달하고 3월 7일 포터 대사에게 조속한 회신을 거듭 요청했다는 것이다.
 
특히 외무부는 이 자료에서 ‘Aide-Memoire’ 내용은 1954년 9월 7일 밀레스 장관과 필리핀 외무장관의 서한, 1958년 6월 20일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가르시아 필리핀 대통령간 공동 코뮈니케와 유사할 뿐 아니라 이런 전례에 따라 제의한 것이라고 설명해 방위조약 보완 주장이 무리가 아니었음을 강조했다.
 
더욱이 박정희 정권은 방위조약 보완 문제를 대미 교섭의 중점 과제로 내세웠던 점으로 미뤄 1.21사태 이후 북한의 무력남침 가능성을 봉쇄하려는 ‘안전판’을 확보하는 데 외교력을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별도로 정부는 1968년 1월23일 북한에 나포된 미국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의 송환 협상과 관련, 북-미 직접교섭에 상당한 불만을 드러낸 사실도 공개됐다. 그해 3월 18일 작성한 한미 외무장관회담 준비자료는 푸에블로호 사건 처리와 관련, “우리의 참여 없이 우리 국토에서 북괴를 상대로 미국이 직접 교섭한다는 것은 우리의 국가주권에 관한 문제와 관련되는 것이며 우리의 중대관심사”라고 밝히고 있다.
 
정부는 또 이 사건에 관계된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에 우리측 대표를 참석토록 해 공개적으로 진행하고 한국정부와 사전 협의 없는 어떠한 조치에도 반대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정부는 북한의 영해 침범 주장에 대해서도 “(나포된)주변해역은 대한민국의 영해로 북괴의 12해리 영해를 인정한다면 간접적으로 북괴를 승인해주는 꼴이 된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지만, 미국 측은 ‘영해침범’ 주장을 받아들이고 승무원들(82명)을 송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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