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 내리고, 성능 높여야 살아남아”

900원 아메리카노를 판매하는 한 커피 프렌차이즈 매장 전경.
경제난에도 여유 즐기고픈 심정 반영된 결과 
1000원 생필품 판매 기업, 新유통 강자로 우뚝 


[일요서울 | 남동희 기자] 지난해부터 이어진 국내외 정세 불안 등으로 침체됐던 소비 심리가 회복세를 타고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장기 불황 속 소비자들의 지갑을 연 주역은 초저가 제품들. 특히 저가여도 고성능, 대용량을 내세운 제품일수록 큰 인기다. 업계 전반으로 번진 ‘초저가 유행’을 들여다봤다.
“900원짜리 아메리카노는 워낙 저가라 질이 안 좋을 줄 알았다. 하지만 최근 마셔보니 2,3000원대 커피와 별반 다르지 않아 자주 사서 마신다” -박모군(24) 대학생-

“평소 커피를 좋아해 하루에 한 번은 꼭 커피를 마신다. 이 가게에서는 한 잔 가격에 두 잔을 살 수 있어서 돈 걱정 안 하고 사 마신다” - 노모씨(32) 직장인-

지난 5일 오후 1시 서울 종로구 혜화동 인근, 일명 ‘900원 아메리카노’를 판매하는 커피숍 앞에서 박 군과 노 씨를 만났다. 박 군과 노 씨 모두 이곳을 일주일에 네다섯 번은 들른다.

그들은 이 매장의 커피는 ‘커피를 좋아하지만 가격에 부담을 느끼는 소비자들’ 사이에서 인기라고 전했다. 900원 아메리카노를 파는 커피 전문 프랜차이즈는 지난해 9월 1호점을 낸지 6개월 만에 수도권에서만 서른 곳으로 늘어났다.

저가 디저트·간식 매장도 길거리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근 한 ‘900원 디저트’ 가게 주인 A씨는 2년 전 이 곳에 매장을 열었다. 마카롱 등의 고급 디저트를 저가에 판매하는 것이 이 곳의 특색이다. 이 매장은 지난해 중순부터 장사가 더 잘된다.

A씨는 창업초기 고급 디저트와 저가 디저트사이에서 고민하다 이 저가 디저트 프랜차이즈를 선택한 것을 매우 잘한 것 같다고 말했다. A씨의 지인들 중 평균 3000~4000원하는 디저트 가게를 오픈한 경우 계속된 불황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1000원짜리 길거리 간식 핫도그를 주력 상품으로 하는 한 프랜차이즈 매장의 아르바이트생 B씨는 저녁때가 되면 제품이 떨어진 적도 허다하다고 말했다. 그는 “저렴한데다 한 끼를 때우기에도 부족하지 않은 양이니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어린 학생부터 직장인들까지도 많이 애용한다”고 설명했다.

너도나도 1000원 간판 내걸어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7년 2월 국제수지에 따르면 경상수지 흑자가 84억 달러로 전달보다 확대됐다. 지난 1월 52억8000만 달러보다 31억2천만 달러(59.1%)가 늘었다. 이는 지난해 11월(88억9천만 달러) 이후 3개월 만에 최대 규모다. 반도체, 석유화학 수출 증대 결과로 국가가 벌어들인 외화가 늘어난 셈이다.

더불어 얼어붙었던 소비자심리지수도 소폭 상승했다. 지난 3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3월 소비자심리지수는 96.7로 전월대비 2.3포인트 올랐다. 업계 전문가들은 국내 정세 불안, 고용난 등의 원인으로 지난해부터 지속된 불황이 점차 회복세를 맞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런 경기 회복의 조짐 속 소비자들의 눈길을 끈 상품들은 저가 제품들이다. 대부분 1000원 미만의 가격이다. 특히 최근 이 제품들은 식료품 업계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경제난에도 여유를 즐기고픈 소비자들의 심리를 반영한 결과가 1차적으로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식료품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평가했다.

생필품 시장에서 저가 제품이 강세를 보인 지는 오래다. 일본의 ‘100엔 숍’을 모토로한 국내 생필품 판매 D기업은 2014년 매출 1조를 이미 돌파한 바 있다. 2015년 6월에는 국내 1000호점을 열었다. 지난해 전국에 1100여 개 매장을 운영 중이며 매장 하루 방문객만 60만 명에 달한다.

대형 유통 기업들도 저가 제품 출시에 집중하고 있다. 일명 한 유통 대기업의 ‘노브랜드’ 제품은 이를 겨냥해 출시됐다. 브랜드가 없다는 뜻의 이 제품들은 유통기업이 직접 개발해 마진, 광고비 등을 줄여 가격을 낮추고 품질과 용량을 키우는 데 주력했다.

2015년 4월 총 9개의 상품을 출시됐던 노브랜드 제품들은 1년 만에 900여 가지의 상품을 선보였다. 매출도 껑충 뛰었다. 2015년 약 27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한 이 제품들은 지난해 2000억 원에 가까운 매출을 올린 것으로 추산됐다.

대기업도 저가 상품 출시

업계 관계자는 이런 저가 제품의 호황 현상이 저성장 장기화에 따른 일본식 소비 패턴의 일종이라고 평가했다. 2000년 거품경제가 꺼지던 일본에서 인기를 끌던 SPA브랜드 유니클로 등과 100엔 숍 등이 국내에서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게 그 근거라고 덧붙였다. 

김정식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는 “소비자들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소비를 할 생각이 없다”며 “최근 저축률이 상승한 게 그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소비는 할 생각이 없는데 최소 필요한 것들은 사야 되니 저가 상품을 찾는 것”이라며 “이는 전형적인 불황형 소비의 형태”라고 평가했다. 이어 그는 “현재 일시적으로 경기가 살아난 것처럼 보이지만 완벽한 소비 회복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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