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싶은 날. 유독 그런 때가 있다. 겨울이 지나가고 봄을 앞둔 계절. 꼭 흙을 밟지 않아도 꽃 냄새가 나지 않아도, 충분히 그런 차분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길. 서울 한복판, 북촌. 아주 오랜 시간에 묶인 과거 속에서의 산책, 북촌탐독.

북촌, 예로부터 한양 도성의 권문세가들이 풍류를 읊으며 주거생활을 했던 지역. 오른편으로 위엄이 넘치는 경복궁이 자리해 있고 왼편에는 창덕궁이 담장 너머로 뉘엿뉘엿 보여 왕가의 기운이 넘실대던 곳. 위로는 말갛고 정갈한 북악이, 아래로는 맑고 청정한 청계천이 흐르고 그 너머로 오롯이 솟은 남산까지 아우르니 한반도 땅 이만큼 완벽한 명당이 또 어디 있으랴. 북촌을 걷는다는 것, 그것은 과거 이 지역에 살았던 진짜 한양 사람들의 옛 모습을 찾아가는 것. 날씨가 좋아서 또 날씨가 적당해서 특별히 북촌의 으뜸 경치 여덟 곳을 뽑은 북촌 8경을 걸어보았다.
북촌 1경
“무엇이든 제일 앞에 있는 것은 어딘지 남다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마땅히 그러하기에 그런 것. 창덕궁이 1경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계동길을 따라 올라가다 오른편 창덕궁 1길로 꺾어진 후 다시 100여m. 야트막한 굴곡진 언덕을 넘으면 아슬아슬하게 창덕궁의 지붕들이 담장 위로 드러난다.

창덕궁의 모습을 잘 담을 수 있다는 포토존이 따로 있지만 이 멋진 장면 앞에 그런 상업적 배려는 조금 뒷전으로 물러난다. 규장각과 구선원전 그리고 인정전과 몇 동의 부속 건물들. 창덕궁 전체가 1경이 아니라서 아쉽지만 그것은 솔직히 너무 과한 욕심일 뿐. 모든 것을 다 보여줄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창덕궁의 위세는 그리 거부감이 없다.

오히려 안에서 보는 것과 달리 바깥에서 보기 때문에 느껴지는 애틋함 그리고 비밀을 감춘 것 같은 수줍음. 그 한국적인 감정들이 바로 북촌 8경의 앞자리에 창덕궁이 1경으로 위치하고 있는 이유이다.
▲마고 카페
북촌 2경
“북촌 2경은 마고 카페에서 원서동 쪽으로 올라가는 길에 만나는 공방거리다”

꼭 공방에 들어가 보지 않아도 이 거리의 정취는 유리창을 통해서도 그 온도와 공방 특유의 마음이 전해진다. 전시돼 있는 잘 빚은 그릇에서는 작지만 예술의 흔적이 묻어나고 주인장의 감성이 묻어나는 소품들과 손으로 직접 만들어진,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공예품들은 이 거리를 북촌에 꼭 필요했던 반짝이는 공간으로 이끄는 데 모자람이 없다.

이 공방 거리는 예전 왕가의 일을 하던 사람들이 모여서 형성된 거리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그만큼 과거의 자부심이 길 속속이 녹아 있다.
북촌은 이미 서울을 넘어 세계적인 관광지로 알려져 있기에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그래도 2경은 사람들의 동선에서 조금은 떨어진 곳이기에 만약 아침나절에 이곳을 걷는다면 의외로 호젓한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북촌 2경은 이 지점에서 원서동에서 가회동으로 그 구역을 넘겨준다.
▲고희동가옥
북촌 3경
“가회동으로 들어와 서쪽으로 언덕을 넘으면 3경으로 이어진다”

언덕은 조금 가파르지만 북촌에서라면 옛날 왕가의 주변에 살았던 사람들처럼 마음껏 뒷짐을 지고 또 보폭을 넓혀 걸어볼 필요가 있다.
속도는 가능한 느리게 그리고 호흡은 적당히. 북촌 탐독이란 마땅히 그런 걸음일 터이니 말이다. 중앙고등학교 앞 부근인 가회동 11번지. 골목골목 이어진 한옥을 그야말로 감상할 수 있는 곳 북촌 3경.
담벼락 너머 비죽이 나와 있는 이름 모를 나무들마저 정겹고, 무심하게 보이는 나무 창틀은 마치 갤러리의 액자처럼 걸려 있다. 대대로 북촌 사람들이 살고 있는 실제의 공간이므로 조심스럽게 다녀야 할 곳. 북촌에 대한 예의 그리고 그 예의에 대한 북촌의 보답. 이 일대를 종으로 가로 지르는 북촌로를 넘어가면 이제 북촌 4경이 펼쳐진다.
북촌 4경
“좁은 길을 따라 가다보면 담벼락 너머로 한옥 특유의 지붕들이 첩첩이 펼쳐진다”

북촌은 안국역을 기준으로 종으로 북촌로와 삼일대로로 경계하며 또 횡으로는 율곡로를 기준한다. 이 북촌로를 중심으로 왼편에 4경부터 8경이 위치하고 있다. 가회동 31번지 일대.
4경부터 7경까지는 북촌에서 가장 많은 한옥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4경은 그 중에서 조금 찾기가 어렵다. 다른 곳들은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져 따라가기만 해도 찾을 수 있지만 4경은 조금 외진 곳에 있기 때문이다. 언덕을 올라가다 옆길로 소릇이 새는 길. 휑뎅한 시멘트 담벼락을 따라가는 길이므로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한 다면 분명 외면하고 말 길이다.
가회동 성당
그래서인지 북촌을 안내하는 북촌 도우미들은 이 4경 주위에 자주 자리를 지키고 있다. 좁은 길을 따라 가다보면 담벼락 너머로 한옥 특유의 지붕들이 첩첩이 펼쳐지고 그제야 기꺼이 이 지점이 8경 중 하나로 꼽힌 이유를 알게 되는 곳.

북촌의 특성이 가장 잘 나타나 있으며 사진으로도 가장 잘 표현이 된다는 북촌 4경. 하늘 위로 어지러이 이어지는 전선줄이 다소 시야를 방해하지만 어찌 할까, 이 또한 4경의 본 모습이니.
북촌 5경, 6경
“5경과 6경은 한 길이다"

그 하나의 길을 두고 아래에서 언덕을 올려다보는 5경과 같은 길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6경으로 나누었다. 북촌 8경 중 가장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며 그래서 이곳저곳 실거주민들을 위한 배려의 주의가 요구되는 곳.
어떤 이는 이 단순한 하나의 길이 다분히 인위적이거나 상업적으로 나뉘었다며 마뜩치 않은 표정을 짓지만 그것은 이 길에 숨어있는 극적인 구성을 미처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옥들 너머로 고층 건물들이 잔뜩 보이는 현대의 모습과 또 그런 길에서 올라오면 한옥과 그 한옥의 담장과 대문으로 길이 꾸며진 과거의 모습이 교차된다는 점.
과거와 현재가 한 공간에서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완전히 달라 보이는 극적 미학. 천천히 오르다 또 느리게 내려가다 보면 느끼게 되는 뜻밖으로 속 깊은 길. 마침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씨들이 이 길에 살포시 등장한다. 뉘댁 처자들일까, 또 어떤 양반집 가문의 규수들일까, 한복이 지닌 저고리와 소매의 섬세함과 사뿐함 그리고 한옥이 갖춘 영리함과 평온함. 이 길에 서면 살아있는 한국식 정서가 모두 보인다.

아침 일찍 와서 이 곳을 걷는다면 조금은 더 이 길이 이야기하는 길의 미덕을 깨닫지 않을까. 5경과 6경은 북촌 최고의 길임에 틀림없다.
북촌 7경
“북촌 탐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여유를 누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북촌을 걷고, 또 그런 것을 북촌의 골목들이 전해준다. 여유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크던 작든 또 많든 적든. 서울 한복판에 이처럼 많은 한옥들이 그것도 오밀조밀하고 때론 위엄 있게 보존돼 있는 줄 미처 몰랐다면 이곳에 오랫동안 머물러도 좋다.

한옥 특유의 단아함과 그런 마음이 머무는 안정감과 평화로움. 한옥은 이런 것들을 큰 내색 없이 보여준다. 한옥이 주는 것은 단지 건축 같은 형태나 옛것이라는 시대를 나누는 단어에 머무르지 않는다.
수없이 복제되는 단순한 사각 형태의 집이라는 틀을 넘어 멋지게 솟은 기와지붕을 이고 한지를 붙인 격자무늬 창틀을 담고, 마당 깊은 공간을 품고 있는 한옥. 그 속의 구들과 집안 곳곳이 밴 나무 향기는 얼마나 과학적이고 또 자연 친화적이더냐.

조용히 담벼락에 기대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봄날의 감상이 가능한 곳, 7경.

북촌 8경
“북촌 탐독의 마지막 지점, 8경이다”

8경은 가회동에서 삼청동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이루는 돌계단길을 일컫는다.

지나온 다른 경치들과 조금 다른 풍경이라 의아스럽기도 하지만 이곳의 한 개의 암반 전체를 깎아 계단을 만들었다는 특색이 있어 다소 색다른 구간이다.
북촌 8경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스폿을 가파르게 내려가는 길로 잡은 것도 북촌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의 구성. 힘들게 올라야 하는 8경을 처음 시작점으로 삼는 이도 있으니 어쨌거나 이 북촌 스토리텔링은 올라가거나 내려오는 두 개의 길 중 하나로 결정된다.
길의 시작이 되었건 끝이 되었건 항상 길이란 이렇게 힘이 드는 법. 계단을 내려오면 삼청동으로 이어지며 물론 올라가는 루트를 잡으면 가회동으로 연결된다.
북촌에서 느꼈던 고즈넉한 북적임과는 확실히 다른 삼청동만의 분주함이 또 다른 북촌탐독을 기대하게 만드는 순간, 언젠가 또 다른 여행자는 다시 북촌을 찾게 될 것이고 북촌은 계속 이곳에 남아 이곳을 찾는 많은 이들에게 탐독의 길을 기꺼이 내줄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북촌 9경

공식적인 경치는 아니다. 다만, 못내 아쉬워 내 마음대로 삼아둔 백인제 가옥. 후에 북촌 9경이 생겨 말석이라도 하나 준다면 반드시 들어가야 할 북촌한옥의 결정체.

<사진=여행매거진 GO-ON 제공>

프리랜서 이곤 기자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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