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과 소신 지켜 온 보수의 適者…입법·사법·행정부 거친 인재

[일요서울|장휘경 기자] 자유한국당 김재원 의원이 4·12 재선거에서 당선하며 ‘오뚝이’ 같이 재기했다. 지난 17대와 19대에 이어 이번 재선거에서 득표율 47.5%로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으며 드디어 3선 고지에 오른 것. ‘상주·군위·의성·청송’이 전통적인 여권 강세 지역이긴 했지만 ‘최순실 게이트’의 폭풍이 지나간 후 맞이한 첫 선거였기에 이른바 ‘친박핵심’이었던 김 의원에게 어려운 싸움이 예상됐다. 하지만 선거 결과 김 의원이 압승하며 다시 한번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변은 없었다. 12일 치러진 경북 상주·군위·의성·청송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자유한국당의 김재원 후보가 총 득표율 47.5%, 총 득표수 4만6022표로 승리했다. 최대 경쟁후보로 꼽혔던 무소속의 성윤환 후보(득표율 28.7%)와 더불어민주당 김영태 후보(17.6%), 바른정당의 김진욱 후보(5.2%)를 무난히 제치며 3선 고지에 오른 것이다.

“저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보수 정치의 재건을 열망하는 지역 주민 모두의 승리입니다. 무너진 보수 세력이 재기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겠습니다.”

개표가 완료된 13일 새벽, 카메라 앞에 선 김 의원은 예의 우직한 인상과 늠름한 풍채를 보이며 짧고 단호한 어투로 당선 소감을 밝혔다. 절제와 더불어 정확하고 논리적인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그는 “낮은 자세로 국민을 섬기는 국회의원이 되겠다”며 이번 선거를 통해 무너진 보수세력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다고 자평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파란만장한 정치 역정을 보여준 바 있는 김 의원은 온화한 미소 속에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숨겨놓은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성실하고 묵묵하게 자신의 밭을 꾸준히 갈고 있는 우직한 황소의 성정(性情)을 닮았다는 주위의 평가가 많다.

의성에서도 오지 깡촌인 안평면 삼촌리에서 태어난 김 의원은, 담배농사를 짓는 전형적인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빈한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안평중학교와 대구 심인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법학과에 진학한 김 의원은 대학재학 시절인 1987년 제31회 행정고시에 합격, 이듬해부터 총무처 행정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고 내무부와 경북도청,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 등 여러 기관을 두루 거쳤다.
 
관료ㆍ검사 거쳐 정치인으로
 
관료의 길을 걷던 그가 1990년 사법고시를 준비하게 된 이유는 특별나다.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에서 근무하던 당시 김 의원은 우루과이라운드 발효 중 미국과 쇠고기협상 등을 진행하면서 공무원도 전문 영역을 개척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했고 이 때문에 사법고시를 치르게 됐다.

결국 1994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 생활을 시작했고 부산지검 검사를 시작으로 포항지청과 서울지검을 거쳤다. 하지만 서열의식이 강한 검사 조직의 생리에 견딜 수 없었던 그는 검사 생활을 5년 만에 정리하고 만다.

포항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연 김 의원 인생에 또 한 차례의 변곡점인 정치 입문도 이 시기에 이뤄졌다. 2003년 대선자금 수사가 정국을 흔든 때였다. 자주 만나던 신문기자와 시국을 성토하다 각자 고향으로 가서 국회의원에 당선돼 나라를 바로잡자고 결의하게 되었던 것.

우여곡절 끝에 김 의원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경북 군위·의성·청송 선거구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처음 국회에 입성, 정치인으로 변신한다. 이후 김 의원은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치러진 한나라당 대선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당시 박근혜 후보 측 대리인으로 활동하며 ‘친박계’의 핵심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친박계’라는 꼬리표 탓이었을까. 한나라당 계파싸움에서 MB계에 밀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의 공천을 받지 못했다. 당시 공천 발표 하루 전날까지도 공천 탈락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는 김 의원은 좌절했지만, 스스로의 인생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눈앞의 이익만 따르지는 말자고 다짐했단다.

지역구 국회의원이 자당으로부터 공천을 받지 못하면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게 우리 정치판의 일반적인 수순이었지만 김 의원은 공천결과에 승복했다. 김 의원은 원칙과 소신을 지키는 고집스런 정치인이라는 면모를 보여준 셈이다.

공천 탈락 후 김 의원은 원외 활동을 이어오다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72.7%라는 높은 득표율로 당선돼 다시 배지를 달았다. 이후 19대 국회에서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의 간사를 맡았고 박근혜 정권의 창출을 도왔다. 당에서도 전략기획본부장을 맡아 주요 전략과 중장기적 기획 업무를 총괄하는 등 당의 핵심 역할을 맡기도 했다.

2016년 제20대 총선에서, 한국당의 전신인 새누리당 예비 경선에서 탈락했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정무수석비서관으로 전격 발탁되면서 ‘친박 중의 친박’, ‘박근혜의 오른팔’ 등으로 세간에 회자됐다.

18대 공천탈락에 이어 김 의원의 두 번째 정치적 위기는 지난해 말 국정농단 국면에서 찾아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함께 김 의원의 정치적 생명도 끊어지는 듯 했던 것. 그러나 그는 이번 재선거로 화려하게 정치무대에 다시 등장하며 저력을 과시했다.
 
친박의 부활?
앞으로의 정치 행로 주목

 
김 의원이 과반에 가까운 득표율로 여의도 재입성에 성공하긴 했지만, 이번 재선거가 김 의원에게 그리 호락호락했던 것만은 아니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관적인 시각이다.

특히 이번 국회의원 재선거는 옛 새누리당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으로 분화된 이후 처음으로 텃밭에서 맞붙은 선거였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관심을 끌어 모았다.

김 의원은 이번 선거를 통해 탄핵 정국과 보수 세력 분열이라는 악재 속에서도 보수 텃밭의 자유한국당에 대한 지지는 여전함을 여실히 보여줬다. 일각에서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이로 인한 탄핵정국 초래라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던 한국당에 면죄부를 주는 선거였다는 시각도 있다.

결국 앞으로 남은 임기 내에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고 보수의 적통을 가진 정치인으로서의 면모를 확실히 보여줘야 하는 책무가 김재원 의원의 몫으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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