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고, 도망치고 싶고, 학교 떠나고 싶다”

<뉴시스>
한국예술종합학교 익명 SNS 계정에 ‘폭로’ 잇따라
학생회·교수…사과 “‘남학생 상견례’·음주 강요 등 폐지”

 
[일요서울 | 권녕찬 기자] 대학 내 선후배 간 예의와 질서라는 미명 하에 신입생들이 고통에 허덕이고 있다. 선배들의 음주 강요와 폭언, 알몸 장기자랑까지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언행을 고발하는 목소리가 빗발치는 상황이다. 이들 중에는 선배들의 가혹 행위 때문에 “두렵고 도망치고 싶다”는 절망적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아랫사람에게 군기를 강요하는 ‘젊은 꼰대’들이 사회적으로 심각한 수준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지성의 상징인 대학에서 전통을 빙자한 ‘악습’과 ‘인권 침해’가 되풀이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지난 10일 익명으로 글을 올릴 수 있는 ‘한예종’ 페이스북 페이지 ‘한국예술종합학교 대나무숲’에는 성희롱과 음주 강요 등 부당한 선후배 문화를 고발하는 글 하나가 올라왔다. 글을 작성한 A씨는 “전통예술원에서 ‘전통’으로 내려오는 ‘남자 상견례’(남상)라는 성희롱 문화에 대해 아십니까?”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남상은 남자 선후배가 모여 친목을 도모하는 목적의 전통이었으나, (지금은) 의미가 점점 변질돼 선배를 웃겨야 하는 신입생들의 광대놀음이 되었다”며 “이에 더해 선배를 웃기지 못하면 옷을 하나씩 벗는 성희롱을 당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이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결국 알몸으로 선배들의 유희거리가 되기 위해 춤을 춰야 한다”며 “이 과정에서 굉장한 성적 수치심을 느끼지만 신입생 입장에서는 자신의 의사를 전혀 표출할 수 없기 때문에 그저 묵묵히 당하기만 한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남녀평등과 성에 관한 문제로 굉장히 예민한 사회분위기에 아직도 이런 활동을 전통이랍시고 유지하는 것은 ‘인권유린’이라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고발성 글 이어져
 
비상식적인 대학 단체 문화를 알리는 내부 고발 글이 올라오자 다른 학생들의 글도 이어졌다. 다른 익명의 글을 올린 B씨는 “전통원 신입생연주회가 끝나면 신입생 환영회가 열리는데, 신입생들을 줄줄이 술집 의자 위로 일으켜 릴레이식으로 소주 한 병 원 샷을 시킨다”며 “한 사람이 소주 한 병을 다 비워야 다음 사람 차례로 넘어간다”고 밝혔다.

그는 “술 좀 마신다는 사람도 소주 한 병을 원 샷하면 멀쩡하기 힘든데, 개개인의 주량과 의사에 상관없이 원 샷을 강요하는 것은 명백한 폭력”이라고 비판했다. C씨도 선배들의 부당한 군기 때문에 고통을 호소했다.

더 이상 부조리함을 참을 수 없어 이 글을 썼다는 그는 “수업에서 1학년들은 미리와 앉아 있어야 하며 선배들 한명 한명 들어 올 때마다 일어나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해야 한다. 만일 하지 않으면 집합이다”라며 “집합을 해서 하는 말은 늘 똑같다. 사회생활 못 하냐. 인사 왜 안 하냐. 왜 아래 학번 군기 안 잡냐. 우리가 X 같냐. 이런 얘기만 한 두 시간 반복한다”고 한탄했다. 그는 “두렵고 도망치고 싶고 이 학교를 빨리 떠나고 싶은 생각”이라고 토로했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지난 12일 전통예술원 학생회는 사과를 하고 재발 방지 대책 등을 내놨다. 이들은 ‘남상’과 신입생 환영회의 음주 강요, 큰 소리로 자기소개하기 등을 폐지하고 매 학기 성폭력 및 성희롱 예방교육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전통예술원 내 고질적인 선후배 간 수직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힘쓰겠다고 했다. 다만 학생회는 ‘남상’은 전통예술원 전체의 모임이 아니라 일부 음악과와 한국음악작곡과 남학생의 모임이라고 설명했다.
 
전통예술원 음악과 교수진도 이날 입장문을 통해 사과의 뜻을 밝혔다. 이들은 “이러한 사실을 미리 인지하지 못하고 공론화되고서야 수습하게 된 점에 대해 모든 교수진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재발 방지와 학생들과의 소통 창구 마련으로 학교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캠퍼스 곳곳에 ‘군기’(軍紀)
 
이 같은 대학 내 고질적 ‘군기 문화’는 한예종만의 문제는 아니다. 캠퍼스 곳곳에서 ‘선후배 간 질서’, ‘학과 전통’이라는 미명 하에 억압과 강요가 난무하고 있다. 지난달 경기도의 한 사립대 체대에서 선배가 신입생들에게 “짧은 치마 금지, ‘다나까’ 말투 사용, 슬리퍼 금지” 등의 지침을 나눠준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지난 1월에는 전북의 한 사립대학 체육대회에서 학과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술을 그릇에 가득 담아 마시는 ‘사발식’을 강요하고 ‘거수경례’까지 지시하는 일도 있었다. 또 지난해 3월엔 부산의 한 사립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 동아리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오물 막걸리’를 뿌려 사회적 파장이 일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꼰대 문화의 악습이 대물림되고 있다며 학교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어른들의 권위주의, 꼰대 문화를 지적하는 대학교에도 서열 문화가 스며드는 모순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규율을 강요하는 선배들도 신입생 시절 분명 똑같은 경험을 했을 텐데, 악습이 없어지지 않는 이유는 ‘너희(신입생)도 견뎌야 한다’는 보상심리가 어느 정도 작용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학생들이 생각을 바꿔서 자체적으로 악습을 없애면 좋겠지만 여의치 않다면 학교가 나서 학생들을 상대로 꾸준히 교육하고 화합의 장이 되는 이벤트를 마련하는 등 자체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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