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서 즐기는 모험과 탐험’ 누군가의 이야기에 바다 외에는 그럴듯한 장면들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필리핀으로 떠날 핑계는 바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기에 모험과 탐험이라는 단어가 낯설었다. 그렇게 떠난 여행에서 발견한 그곳, 이제부터 클락이라 부르고 어드벤처 캐피탈이라고 쓴다.

클락의 정식 명칭은 ‘클락 자유 무역항’이다.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약 80킬로미터 떨어진 팜 팡가 주의 마발라캇 시티와 앙헬레스 시티 일대를 흔히들 클락이라고 부른다.

오래도록 미 공군이 주둔했던 기지이면서 최근에는 특수 경제구역으로 지정되며 비즈니스 중심지로 각광받고 있는 클락, 그리고 늘 클락과 함께 이야기되는 인접한 수빅 지역은 필리핀에서 가장 깨끗하고 깔끔하게 정돈된 도시들이다.

이미 최상급의 골프코스와 어학연수, 다양한 면세 혜택과 뛰어난 접근성 등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고, 한인 타운이 있을 정도로 한국과 인연이 깊은 이 지역에 요즘 여행자들의 취향을 저격하는 새로운 ‘꺼리’ 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필리핀과 우리에게 생소한 필리핀, 그 모든 매력들을 클락에서 찾아냈다.

어드벤처 캐피탈, 클락


어느 필리핀 전문가는 클락과 수빅을 한국의 가평과 청평에 비유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다양한 레포츠를 즐길 수 있는 수도권의 핫플레이스라는 뜻.
골프와 공군 기지 등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기존의 클락 이미지 때문에 조금 의아해 할 수도 있지만 저마다의 캐릭터와 중독성 강한 어드벤처 프로그램들을 체험하고 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화산 트레킹, 4x4 오프로드카, 해양 액티비티, 요트클럽, 야외 온천과 골프까지.
피나투보 화산 트레킹


1991년 6월, 클락 지역에 재앙이 닥쳤다. 20세기 들어 발생한 전 세계의 화산 폭발 중 둘째로 규모가 컸던 피나투보 화산 폭발이 그것이었다. 이 냉정한 자연의 법칙으로 클락은 순식간에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지역 경제를 책임지던 클락의 미 공군과 수빅의 미 해군이 모두 철수하며 경제를 비롯한 거의 모든 도시 기능이 멈춰버리고 말았다. 이런 아픔의 시간은 재건을 통해 치유되고 다시 제 모습을 회복했지만, 피나투보 만큼은 자연의 모습 그대로 이어져 여행자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선사하고 있다.
화산의 분출이 바꾸어놓은 경이로운 자연의 흔적들은 클락을 찾아야 할 가장 흥미롭고 영향력 있는 이유가 아닐까. 피나투보 화산을 오롯이 온몸으로 느끼는 시간은 완전히 새로운 필리핀을 경험하는, 어쩌면 유일무이한 단 하나의 극한 설렘일지도 모른다. 이른 새벽, 피나투보로 향하는 여정이 시작됐다.
클락의 숙소에서 출발 해 어둠을 뚫고 약 1시간가량 달려 피나투보 화산 트레킹이 시작되는 입산 등록 사무실에 도착, 간단히 서류를 작성하고 다음 여정을 기다렸다. 지팡이를 들고 나와 여행객들에게 팔고 있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이 안쓰럽지만 이 마을의 생활방식이라는 생각에 결국, 대견해보였다.

4x4 오프로드 차량으로 갈아타고 피나투보 화산의 거친 품속으로 다시 길을 떠났다. 순식간에 풍경은 모래가 휘날리는 황량한 땅으로 뒤바뀌었고 차량은 끊임없이 덜컹대며 미지의 세계를 온몸으로 깨닫게 했다.
앞좌석의 드라이버와 가이드는 대화를 나누며 낄낄댈 정도로 여유로워 보였지만, 뒷좌석의 여행자들은 몸이 흔들려 혹시 모를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좌석에 몸을 꼭 밀착시켰고, 대화는 점점 줄어들면서 각자 멍하니 스쳐가는 풍경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럼에도 순식간에 적막을 가르는 ‘우와’하는 함성이 차량들의 행진을 따라 줄줄이 이어지곤 했다. 피나투보가 조금씩 자신을 드러내며 자연의 험난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보여 주고 있었다.
‘또다시 이런 풍경을 마주하며 이런 길을 걸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쏟아져 흘러내린 용암이 만들어 놓은 길을 걷기 시작했다. 유황 냄새와 화산재가 남아 있고, 깎이고 쓸려서 제멋대로 자리 잡은 암석과 바위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때로는 흐르는 계곡을 건너고 숲속의 싱그러움을 음미하며 그렇게 피나투보 화산의 정상에 닿았다. 지하에서는 여전히 끓고 있는 화산의 정상은 그 속내를 감춘 채 평화만을 내어주고 있었다.
이 세상에 나 혼자만이 있는 듯한 한적한 고요, 지금 이 순간이 이 세상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과거의 어디쯤인 것 같은 착각, 그럼에도 마음을 더욱 푸르게 만들어주는 호수의 색과 떨림이 웅크리고 있었다.

탐험의 끝에는 아무도 모르는, 아무에게도 가르쳐주고 싶지 않은 비밀이 가슴 속에 또아리를 튼다는 사실. 필리핀에서도 피나투보에 오른 여행자만이 가져갈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일 것이다.
푸닝 온천
2004년 문을 연 푸닝 온천은 팜팡가 주에 있는 아에타족의 땅에 한국인 사업가가 개발한 웰빙 시설이다. 때문인지 클락을 찾는 한국 여행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이자 놓쳐서는 안 될 명소로 알려져 있다.
온천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한국적이고 우리에게는 익숙해서 그곳을 찾기 전에는 조금 걱정도 했었다. ‘넉넉하지 못한 시간에 필리핀까지 와서 웬 온천.’ 하지만 푸닝 온천에 대한 설명을 듣고 방문객 센터에서 옷을 갈아입은 뒤, 온천을 향해 가는 길에 그 생각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한때 화산재로 뒤덮였던 계곡을 오픈카를 타고 질주하는 경험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할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산 속 깊은 곳에 숨겨진 온천에 가기 위해서는 피나투보 화산 트레킹을 가듯 4x4 오프로드 차량을 타고 약 30분간 올라가야만 한다. 오픈카가 멈춰선 곳에는 뜻밖의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깊은 산 속에 숨겨진 낙원, 무릉도원이 떠올랐다. 화려하지도 고급스럽지도 않지만 온기와 여유가 있었고, 누군가의 뜨거운 열정과 배려가 그 안에서 조용히 숨쉬고 있었다. 며칠쯤 작은 방에 머물며 홀로 그 기운들을 마음껏 음미하고 온천을 즐기고 싶은 마음, 내 안에 또 하나의 버킷리스트를 담아놓았다.
11개의 온천탕은 저마다 다른 기운과 풍경을 선사해 머물기로 했던 시간은 순식간에 달아났다. 탕 속에 앉아 넋 놓고 온천욕을 즐기다 급히 정리를 하고 이색 찜질과 마사지를 받을 수 있는 스파 스테이션2로 이동했다.
씨름판 두 개 정도를 붙여놓은 크기의 사각 모래판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가지런히 누웠다. 바닥에서는 숯으로 불을 피워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고 아에타족 직원들이 모래로 몸을 모두 덮은 뒤 발로 살살 밟아가며 마사지를 이어갔다. 어린 시절 따스했던 해변의 추억이 스물 스물 떠오르던 15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니 몸과 마음에 위로가 전해져 뜻밖의 감성이 찾아들었다.
그 짧음이 마냥 아쉬워 좀 더 모래 속에 몸을 뉘고 싶던 시간. 그렇다고 다 끝난 것은 아니다. 피나투보 화산에서 직접 채취해서 일주일간 말린 유칼립투스 잎을 섞어 만든 진흙을 온몸에 바르고 누웠다.

노곤해졌던 몸에 다시 생기가 도는 듯한 기분. 마음에서 시작된 건강한 기운이 온몸으로 그리고 피부 깊숙이까지 골고루 퍼져 여행이 더욱 산뜻해지고 있었다.
잠발레스 해변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필리핀의 바다, 잠발레스는 클락에서 자동차로 약 2시간이 조금 넘는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마닐라를 비롯한 수도권 시민들의 휴양지로 주말이면 잠발레스로 휴식과 해양 액티비티를 즐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특히 따뜻한 날씨와 해풍은 서핑을 즐기는 데 적당해 전 세계 서퍼들의 방문이 줄을 잇는다. 그렇다고 잠발레스에 이렇게 생동감 넘치는 여행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바다와 산 그리고 강이 한데 어우러져 또 다른 바다의 낭만을 선사하는 곳도 있다.
바다 뒤로 숨겨진 강과 숲 속의 정적인 풍경은 여행지로서 해변의 동적인 이미지에 온화함이라는 단어를 추가시켰다. 그 현장에 있지 않으면 상상조차 쉽지 않은 그 오묘한 경험을 잠발레스의 아나왕인 코브에서 만났다.
방카가 닿은 곳은 필리핀의 여느 해변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모래사장을 지나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순식간에 달라졌고, 조금 전까지 머리에 담겼던 바다의 이미지는 모두 사라졌다.

누군가 오래도록 감춰놓기라도 한듯, 원시의 자연이 그대로 남아있는 풍경은 우거진 침엽수림과 강물의 투명함으로 잔잔하게 비춰지고 있었다. 휴대폰 신호는 자취를 감췄고 전기 시설도 사용할 수 없었다. 아날로그 감성만이 그득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는 그곳에서 만난 것들은 작은 텐트와 사람들의 웃음소리, 음식이 익어가는 냄새였다.
▲<사진제공=필리핀항공>
▲<사진제공=필리핀항공>
그 감성은 다시 방카를 타고 나와 잠발레스를 떠나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해가 조금씩 저물어 가는 순간, 해변에 나란히 앉아 망중한을 즐기는 연인들의 모습은 익숙한 것이지만 특별해져 있었다. 가슴을 따뜻하게 바꿔주는 바다, 잠발레스가 알려준 바다의 또 다른 자화상이었다.
수빅베이 요트클럽

수빅은 행정구역 상 우리나라의 도에 해당하는 잠발레스 주에서 가장 큰 도시다. 클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피나투보 화산이 폭발한 이후 수빅에 주둔하던 미 해군이 철수하면서 도시는 큰 어려움에 처했다.
▲<사진제공=필리핀관광청>
하지만 시민들은 미 해군이 철수하면서 남기고 간 다양한 군 시설과 장비들을 활용 하여 산업 기반 및 관광 시설들을 구축해 나갔고, 전 세계적인 군 기지 재활용 도시의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됐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수빅에 ‘필리핀의 캘리포니아’라는 애칭을 선물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도시와 럭셔리한 요트들이 떠 있는 풍경에서 캘리포니아의 도시들이 떠오른다. 수빅베이 요트클럽 역시 이러한 역사와 무관하지 않은 곳으로 요트클럽에는 수백 척의 크고 작은 요트들이 정박하고 있다.
▲<사진제공=필리핀관광청>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는 이곳의 요트를 타고 수빅만을 한 바퀴 돌아보는 럭셔리한 여행이 준비돼 있다. 호화로운 요트에 올라 와인 한 잔과 더불어 수 빅만의 선셋을 감상하는 경험은 클락 여행의 마침표를 찍기에 충분할 것이다.

프리랜서 김관수 기자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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