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이창환 기자] <킬미나우>는 죽음과 성과 불구를 다룬다. 불치병과 장애를 매개로 인간의 어둡고 보편적인 운명을 그리는데, 그 은유는 건조하며 힘 있고 정직하다. 사랑과 영원히 이별하고 기형과 성욕에 갇혀 사는 인간상을 통해 보통 사람을 위로하며 작은 불행을 실제로 작아 보이게끔 한다. <킬미나우>에 담긴 삶의 모순과 불완전성 그리고 슬픔으로 각자의 현실을 돌아보게 하고 생각하게 한다. <킬미나우>는 안락사, 성, 신체적 불구를 어떻게 쓰는 줄 모르는 여타 작품과는 다르다. 위 주제들을 판타지에 대입하고 자극적인 소재로 이용하고 그나마 잘 쓰는 다른 이야기에 종속시키는 작품과도 다르다.

<킬미나우>에서는 관객들이 훌쩍이는 소리가 많이 들린다. 몇몇 이들은 연극을 보고 나와서도 슬퍼한다. 극장을 빠져나와 근처 소파에 앉아 울던 여성을 본 경험은 2년 전 <히키코모리 밖으로 나왔어> 관람 때 아마 처음이었는데, 이번에 다시 그런 관객을 봤다. 감정에 솔직한 사람들을 보면 자신이 느낀 감정에 확신이 생기고 유대감이 생기는 것 같다. <킬미나우>의 격정적 장면들은 감정적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이고, 치열하게 관념적이다. 그 균형이 아니었다면 극장에서 조용하게 울리는 누군가의 흐느낌은 공감을 얻지 못했을지 모른다. 눈물은 관객을 무장해제 시킴과 동시에 날카롭고 예민하게 만든다. 밖으로 표출하는 흐느낌은 다른 관객에게 미세한 불쾌감이나 질투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작품의 완성도만이 다양한 반응 사이를 이어주며 <킬미나우>는 이를 가장 어려운 방법으로 해낸다.

사회적으로 불쌍하고 비천한 사람이 누군가를 통해 불멸의 존재가 되는(그렇게 비치는) 장면은 연극과 공연에서 자주 등장한다. 이를 겉으로 분명하게 드러낸 작품 중 <맨 오브 라만차>가 있다. 창녀 알돈자를 돈키호테만이 하늘에서 내려온 여인으로 여기며 알돈자는 돈키호테의 죽음 앞에서 드디어 자신을 스스로 둘시네아라 칭하며 삶의 비극을 돌파할 힘을 얻는다.
제이크 스터디는 못생긴 괴물로 놀림 받는 장애인 아들 조이 스터티를 모든 희생을 기꺼이 치르며 사랑한다. 그런 조이는 아버지 제이크를 통해 변한다. <맨 오브 라만차>의 극적 결과는 환상과 낭만, 애틋한 사랑과 관계를 맺지만 <킬미나우>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둘시네아의 변화로 세계는 이제 달라질 것 같고 그녀 뒤로는 후광이 비치지만 <킬미나우>는 단지 일상에 파묻힐 조이를 안타깝게 응원하고 싶을 뿐이다. <킬미나우>의 은유는 그래서 건조하고 힘 있고 정직하다. <킬미나우>에도 현실을 뛰어넘는 연출은 등장하지만 불치병과 장애라는 강렬한 매개 속에서 다른 상상력은 존재감이 크지 않다.
<킬미나우>는 예고 없이 벼랑으로 간다. 그 굴곡은 관객을 마음 아프게 하며 놀라게 한다. 북아메리카의 복지가 부럽고 할리우드 영화 특유의 수다스럽고 밝은 분위기가 이어지던 초반에서 갑자기 평화로움과 견딜만한 불행이 사라지고, 삶의 다양성이라는 이름 아래 견디기 힘든 고통만이 남는다. 그리고 남들과 달랐던 조이와 점점 보통사람에게서 멀어지는 제이크의 관계가 새롭게 떠오른다. 두 사람의 순환성은 아들 조이의 성욕(성기)이 치솟을수록 아버지 제이크의 성기(남성성)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죽은 표정’과 곧 죽을 것처럼 보이는 신체의 모습이 닮아가는 것, 소외감과 고독감과 공유하지 못하는 고통을 서로 주고받는 것 등으로 드러난다. 조이와 제이크의 비극은 평행선을 유지하다가도 양쪽에서 번갈아 치우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조이의 성욕은, 무리에 끼지 못하고 외면받는 인간상의 대표적 단면이다. 어쩌지 못하는 본능이자 욕망이고, 끊임없이 솟구치는 불안에서 잠깐 벗어나는 이 위로를 조이는 갖지 못한다. 조이 앞에 놓인 것은 성과 사랑이 아닌 그러지 못함의 확인과 손가락질뿐이다. 성을 남보다 더욱 원할 수밖에 없는 상태이나 더 멀어질 수밖에 없는 순서의 반복, 조이의 고통은 인간이 가진 다른 모든 갈등까지 대변해 평소 잊고 살던 삶의 모순과 갈등을 일깨운다. 배설 같은 성욕(자위)을 건드리고 매춘과 안락사를 건드리나 그 이면에 숨 쉬는 인간성을 잊지 않는 <킬미나우>는 관객을 울리고 설득한다. 이 어려운 과정을 작품과 배우들은 해낸다. 극 중 좀비게임 속 대사로 처음 등장하는 ‘킬미나우’의 암시 또한 극 제목과 연계해 탁월하다. 관람하는 이의 정신을 고대 신화로까지 데려가는 것 같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친부 살인이 나오는 어떤 신화의 슬픈 변주로도 느껴진다. 아버지는 결국 혼자서는 움직이지도 못하는 아들에게 누구도 하지 못할 역할을 부여한다. 아들을 변하게 한다. 삶의 다양성과 비극의 실체를 아들 스스로 받아들이고 돌파하게 한다. 아버지를 양분을 먹고 살던 아들은 끝내 아버지를 딛고 결말 저편에 있는 미지의 비극으로 간다.

이창환 기자  hojj@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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