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이 끝났다. 유례없는 ‘후다닥’ ‘깜깜이’ 선거 끝에 새 대통령이 뽑혔다. ‘빨리빨리’ 문화에 너무나 익숙한 국민이라 그런지 그 짧은 기간에 참으로 능숙하게(?) 앞으로 이 나라를 5년간 이끌어갈 지도자를 선택했다. 저간의 사정이야 어찌 되었건 청와대 주인이 정해졌으니 이제 나라가 좀 안정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국무총리에 내정된 이낙연 전남지사가 내뱉은 첫 마디가 ‘적폐청산’이었다. “적폐청산과 국민통합이라는 것이 잘못 들으면 상충하는 것처럼 들릴 수가 있다. 상충하는 것이 아니고 두 가지가 함께 가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의 말이다.

  대선 다음날 한 신문사는 1면 톱기사에 ‘문재인 대통령 “통합의 시대 열겠다”’라는 제목을 대문짝만하게 달았다. 그런데 대통령 직속에 ‘적폐청산 위원회’를 설치한다고 한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이게 무슨 말인가. 문 대통령은 ‘국민통합’을 외치고 이 전남지사는 국무총리가 된 후 ‘적폐청산’을 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언뜻 들으면 이 지사 말대로 ‘적폐청산’과 ‘국민통합’이 상충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보면 이 두 구호가 양립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지나온 역사를 보라. 우리나라에서 ‘적폐청산’이라는 말은 ‘정치보복’의 동의어(同義語)로 인식돼왔다. 그러니까, ‘정치보복’을 하면서 ‘국민통합’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말이 되는가?
 
  1980년대로 가보자. 정치적으로 우리 국민들에게 거의 재앙에 가까운 시기였다.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자들은 자기들과 생각이 다른 정치인들과 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탄압했다. 그들에게 이념이 다른 사람들은 ‘적폐세력’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국민통합’을 외쳐댔다.
 
  2000년대로 가보자. 군사독재자들에게 그토록 억압받았던 자들이 권력을 잡은 뒤 어떻게 했는가. 군사독재자들이 했던 방식대로 자신을 탄압했던 자들에게 보복을 가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이념이 다른 진영을 서로 배척하며 극심하게 대립하게 됐다. 진영 간 갈등의 골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다. 그리고 이제 10년 만에 다시 정권을 잡은 진보 진영 세력이 보수 10년의 ‘적폐’를 척결하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참 기이한 점은 ‘적폐청산’과 ‘국민통합’이라는 진부한 구호를 늘 부패의 정점에 있었고 툭하면 진영 논리로 지역 간 세대 간 갈등을 조정해온 정치권이 외쳐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이가 없다. 그들이야말로 적폐청산의 주체가 아닌 대상이 아니던가. 보수, 진보 따질 것 없다. 도대체 무슨 권리와 잣대로 ‘적폐청산’을 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얼마 전 북한의 전체주의 체제를 견디지 못해 탈북한 3000명이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당선되면 집단으로 해외 망명하겠다고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들은 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가짜)보수를 촛불로 태워버리겠다’고 발언한 것과, 이해찬 민주당 의원이 ‘(극우)보수를 궤멸시키겠다’고 발언한 것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했다.
이들은 또 “노무현 정부가 북한 인권에 대해 무관심했으며 북한 입장에 동조했다”며 “문 후보가 당선되면 생명권 확보를 위해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탈북자들도 보복이 두려워 이 나라를 뜨겠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일자리 때문에, 국내에선 더 이상 기업하기 힘들어서, 미세먼지가 싫어서 대한민국을 떠나려는, 이른바 ‘코리아 엑소더스 행렬에 합류하려는 국민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 판국에, 정치적인 이유로 이 나라를 떠나겠다는 사람들마저 생긴다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되겠는가. 떠나고 싶으면 떠나라고 할 것인가.

  그런데 참 이상하다. 우리나라에 그렇게 많은 사원과 교회가 있지만, 그 곳에 가는
정치인과 신도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들이 부르짖는 ‘용서의 정신’은 도대체 어디다 내팽개쳤는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역사를 잊는 나라에 미래가 없지만 과거에만 매달리는 민족에 미래 역시 없다. '과거청산'을 빌미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그동안 해오던 '인민재판' 방식으로 배척한다면 탈북자뿐 아니라 누군들 외국으로 이민을 가고 싶지 않겠는가. 문재인 정부가 말하는 '적폐청산'이 구시대적 ‘정치보복’의 동의어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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