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ㅣ고정현 기자]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 드라이브에 맞춰 일요서울은 ‘대한민국 적폐청산 정치 5敵’ 시리즈 기사를 연재한다. 주제는 ▲철새 정치 ▲계파 정치 ▲세습 정치 ▲지역 정치 ▲묻지마 폭로 총 다섯 가지다. 이번 호에서는 철새 정치인들의 몰락을 집중 조명하고자 한다. 2002년 ‘후단협(대통령후보단일화협의회) 사태’, 2017년 ‘바른정당 탈당파’ 등 때마다 권력의 양지를 쫓아 날아다니던 철새 정치인들의 사례를 심층취재했다.
 
<정대웅 기자> photo@ilyoseoul.co.kr
    - 탈당 → 철새·배신자 ‘낙인’... “바른정당 탈당파는 왜 그랬을까?”
- 김영삼·김대중만이 ‘탈당=자살 행위’ 공식 깼다. 왜?

 
의리는 우리나라 정치를 읽는 키워드 중 하나다. 의리는 특정 계파의 생명력을 지탱해주는 원천이자 정당의 내부 분열을 막는 울타리다. 철새 정치인이나 배신자라는 낙인은 바로 이 의리를 깰 때 찍힌다. 이 낙인은 주홍글씨가 돼 정치 생명 내내 따라다닌다. 최근 이 낙인이 찍힌 주인공들은 바로 바른정당 탈당파 13人이다.
 
15년 전 후단협 트라우마 떠오르는 바른정당 탈당 사태
 

당초 바른정당 창당에 참여했던 핵심인사들은 ‘최순실 게이트’ 사태와 관련해 진보 진영보다 더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었다. 친박 패권의 청산 가능성이 없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탈당까지 강행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선 패배의 암운이 드리우자 이들 중 13명의 의원들은 본인들이 만들었던 당을 또다시 박차고 나왔다. 최악은 굴욕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유한국당으로 되돌아갔다는 점이다.
 
이들은 반년도 채 되지 않은 기간 동안에 2번의 탈당이라는 대기록을 남겼다. 철새 정치인이라는 낙인이 반년 만에 찍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향후 정치적 행보는 어떨까? 과거 이인제 전 의원, 손학규 의원의 탈당 실패 사례와 2002년 후단협 사태 등을 살펴보면 답을 유추할 수 있다.
 
이인제 전 의원은 97년 대선에서 이회창 전 총재의 승리로 막을 내린 경선에 불복하면서 신한국당을 탈당한다. 이후 이 전 의원은 국민신당을 창당, 대선에 출마해 492만여 표를 획득하며 선전했다.

그러나 이는 이회창 전 총리가 집권당인 신한국당 후보로 상당히 유리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막판 역전을 허용하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이 전 의원은 보수층으로부터 지탄을 받았다.
 
손학규 전 국민의당 공동중앙상임선대위원장도 당적을 바꾸면서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경선은 이명박·박근혜·손학규의 3파전 구도였다. 승리 가능성이 희박했던 손 의원은 한나라당 탈당이라는 승부수를 띄웠지만 대선 본선에 나서지도 못하는 참담한 결과와 마주해야 했다.

이후에도 당내 경선에서 번번이 패배의 고배를 마셨다. 그는 이번 대선에서도 민주당을 탈당한 뒤 국민의당을 선택했지만 안철수 후보에 밀렸다.
 
지난 2002년 대선을 앞둔 시점 등장했던 ‘후단협(대통령후보단일화협의회) 사태’의 결말은 더 처참하다. 후단협은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무소속 정몽준 후보와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단일화를 위해 출범한 비노(非盧) 의원들 중심으로 구성된 조직이다.

김민석 전 민주당 의원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가장 우세한 후보였던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에 맞서는 ‘반(反) 이회창 연대’를 명분으로 내걸며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지지율이 높은 정몽준 후보에게 후보를 양보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노무현 후보의 승리였다. 비록 선거 막판 정 후보가 단일화를 철회했고 김 전 의원 역시 민주당으로 돌아와 재기를 노렸으나 자기 당 후보를 흔들고 권력을 좇았다는 이유로 총선에서 참패했다.
 
‘독수리 5형제’ 중 김부겸·김영춘 금의환향(錦衣還鄕)
 
반면 위에서 언급했던 ‘탈당=자살 행위’ 공식을 깨뜨린 인물도 존재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80년대 중반 이민우 전 총재의 내각제 구상에 반발해 신민당을 탈당하고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후 87년 대선을 앞두고 통일민주당을 탈당한 뒤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비록 탈당을 선택했던 두 사람이 87년 대선에서 양김(金)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노태우 후보에게 어부지리 승리를 헌납하기도 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을 거쳐 92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92년 대선 패배로 정계은퇴를 선언했지만 이후 정계복귀를 시도하면서 민주당을 탈당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우여곡절 끝에 97년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이뤄낸다.
 
정치권은 이 두 인물이 잦은 탈당에도 불구하고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로 명분 있는 탈당을 꼽는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과거 신민당 탈당 사례는 앞서 언급했던 정치인들과는 달리 분명한 대의명분이 있었기에 ‘철새 정치인’이라는 낙인이 아닌 소신 있는 정치인이라는 훈장을 달게 됐다는 것이다.
 
참여정부 첫해 열린우리당 창당 당시 한나라당을 탈당한 김부겸 의원과 김영춘 의원 등 이른바 ‘독수리 5형제’의 탈당도 명분 있는 탈당 사례로 꼽힌다. 이들은 탈당 전 지역주의 타파와 한나라당 개혁을 주장하면서 행동을 같이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탈당을 강행했고 ‘지역정치 타파 국민통합연대’를 만들었다.

당시 집권당이던 민주당 소속 의원들과 개혁신당을 만드는 게 목표였다. 결국 이들은 11월 민주당을 탈당한 의원들과 함께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이들의 정치 개혁 의지를 우주의 침략자로부터 지구를 지켜내는 만화 주인공들에 빗댄 네티즌들은 ‘독수리 5형제’란 별명을 붙여줬다. 결국 이들 중 김부겸·김영춘 두 사람은 지난 4·13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타이틀로 각각 대구 수성갑과 부산진갑에 도전해 승리를 거뒀다.

다만 나머지 세 의원들은 재기에 성공하지 못한 점을 봤을 때, 명분 있는 탈당이라 할지라도 후폭풍은 불가피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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