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호 전 수방사령관 ‘다락방 회의’ 전모공개

“87년 6월 항쟁 그리고 6·29선언, 그 이면에는‘군의 쿠데타→ 전두환·노태우, 3김의 제거→ 이부영 등 170명의 재야민주화세력에 의한 정권창출’등을 골자로 하는 ‘군부 쿠데타’논의가 있었다.”전 수방사령관 안병호 장군(63)의 충격 증언이다. 그는 <일요서울>에 ‘87년 6·29직전에 30여명의 장성들이 모여 전·노를 제거하고 민주세력에 정권을 이양하는 군부 내 쿠데타 시나리오’, 일명 ‘다락방 회의’의 전모를 털어놨다. <일요서울>에서는 당시 30여명의 군 장성이 서명, 언론에 배포하려 했던 ‘선언문’내용을 최초로 공개하고, 안 장군으로부터 당시 상황을 소상히 들어봤다.5공 정권 호헌 움직임에 장성 30여명 전두환·노태우 제거 논의정권서 군부 이상기류 감지 후 전격 6·29선언 … 현대사 바뀌어‘철없던 시절바람결에 눈물짓고… 철이 아직 덜든 탓에가슴에 묻어둔 10년 탄 숯검정 같은 아픔그 상처가 배시시 고개를 내밀 때’최근 집필한 안 장군의 자작시다. 그에게는 시구에서‘가슴에 묻어둔 10년 탄 숯검정’이라고 표현했듯 10여년 동안 가슴속에 묻어둔 현대사 비밀이 있다.

지난 87년 6월 민주화 항쟁 전후에 일어났던 최고위 권력층과 군 내부의 팽팽했던 신경전이 바로 그 것. 87년 당시 5공 군사정권은 집권 연장 의지와 함께 ‘4·13 호헌조치’를 단행했고, 그해 6월 국민들은‘대통령 직선제’등 민주화를 요구하며 거세게 일어났다. 결국 군사정권은 국민의 민주화 열기에 항복(?)하고 국민들의 요구를 수용, 6·29선언을 발표했다. 안 장군은 “세간에는 당시 민주화 열기와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의 결단으로 6·29선언이 발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군부 쿠데타’등 군 내부의 이상기류도 한몫 했다”며 “국민들의 민주화 열기만으로 5공 정권을 무너뜨리지 못했을 것. 실제로 5공 정권은 6월 항쟁 당시 군 동원령 등 강경 조치로 일관했었다”고 밝혔다. 즉 5공 정권이 국민들의 거센 저항과 함께 군 이탈을 우려, 서둘러 이를 무마하기 위해 6·29 선언을 발표했다는 것. 안 장군에 따르면, 5공 정권 당시 군 이탈 움직임은 지난 86년 이후부터 감지되기 시작했다.

아시안 게임이후 권력 주변에서는 “88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서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이에 정권 연장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이때부터 군부에서는 “5공 정권이 단임과 정권이양이라는 약속을 한 만큼, 이를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다.그리고 군부내 이탈 움직임의 결정적인 계기는 ‘4·13 호헌 조치’. 이 조치로 인해 “5공이 정권 연장에 나서고 있으며, 이를 위해 군대가 동원될 것”이라는 소문이 흘러나왔다. 안 장관은 “실제로 4·13호헌 조치 이후 ‘비상계엄령에 대비한 부대 할당표’라는 지침이 내려왔다”며 “이 지침에는 계엄령이 발표되면 부산은 x사단, 광주는 y사단, 울산은 해병대 등 각 지역별로 군대를 이동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군 일각에서는 이에 반발하기 시작했다”고 털어놨다.하지만 5공 정권은 공개적으로 이런 반발이 밖으로 드러날 경우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안 장군은 “당시 상황에서 이런 얘기를 공개적으로 할 수 없어 소장파 군장성들이 4∼5명씩 모여 시국을 걱정하는 정도였다”며 “그룹 모임은 주로 ‘가정집 다락방’에서 이뤄졌고, 이후 이를 두고 항간에서‘다락방 회의’라는 말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이런 군대 이탈 움직임은 청와대에서도 감지했다는 것이 안 장군의 주장. 안 장군은 “하루는 안현태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이 ‘얼굴이나 보자’며 호출을 해와 청와대에 들어갔다. 그런데 안 실장이‘너 요즘 뭐해’라고 다짜고짜 묻길래 ‘근무 잘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어 안 실장이 ‘쓸 데 없는 짓 하지 말고, 조용히 일이나 열심히 해’라고 말해 ‘제가 무슨…’이라며 웃어 넘겼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이런 가운데, 6월 10일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면서, 6월 민주항쟁이 시작됐다.시위가 거세지자, 소그룹으로 진행되던 군대내 움직임이 점차 조직화되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

리고 안 장군을 비롯한 군장성 30여명이 6월 중순 종로의 한 움식점에서 모여 ‘거사’를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당시 모임에는 안 장군(당시 육군본부 작전처장)을 비롯, 군 사령관 등 대장급 인사 2명, 그리고 육사 20기 전후의 군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기자의 명단 공개요청에 대해 안 장군은 “당시 모임 참석자가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다. 그리고 당시 참석한 인사들이 공개를 꺼리고 있다. 지금도 그분들은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인물들이다”라고 밝혔다.안 장군이 명단 공개를 꺼려했지만, 여러 자료 등을 종합해 볼 때, 그 자리에는 이후 국방장관까지 올랐던 당시 K, L 장군, K 대령, 그리고 C, L 장군 등이 참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소장파 대령부터 군사령관·특전여단·수방사·수도인근 사단장, 그리고 헌병대·보안사 등 정권의 친위부대 등 실질적인 군 실세들이 대거 참석했던 것. 이 모임에서는 “거사를 위한‘선언문’초안을 작성한 뒤 구체적인 행동에 대한 논의는 추후에 결정, 행동통일을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안 장군은“ 당시 모임에서는 5·16, 12·12, 5·18에 이어 정권연장을 위해 또다시 군대가 동원되면 나라가 흔들릴 수 있다며 어떻게든 군대 동원을 막아야 한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며 “그 중에는 ‘목숨을 걸고 혁명을 해야 한다’,‘key(전두환 대통령)를 제거해야 한다’, ‘노태우 대표에게 맡겨보자’ 등의 의견도 나왔다”고 회고했다.

특히 당시 시나리오에는 ‘군의 쿠데타→ 전두환·노태우, 그리고 3김의 제거 → 깨끗한 민간지도자에 의한 정권 창출’이라는 구체적인 내용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안 장군은 “당시 군부에서는 쿠데타에 실패하면 목숨을 버려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가 있었다. 또 성공하더라도 과거처럼 정치에 관여하지 말고 민간정부에 이양한 뒤 해외로 이민가자는 얘기도 있었다”고 말했다.이어 안 장군은 “군부 쿠데타에 이어 민간정부를 맡을 인사들에는 전·노, 3김 등 기존 정치인들이 배제됐다”며 “대안으로 정치원로, 그리고 이부영 등 재야 및 민주 인사들이 거명됐다”고 털어놨다.실제, 안 장군 등 군부 일각에서는 군부 쿠데타에 이어 다음 정권의 지도자로 170여명의 인사들의 명단과 이력을 작성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군대 동원에 대한 군부내 반발 및 저항 기류에도 불구, 그해 6월 18일을 전후해 이미 작성돼 있던 ‘소요작전대비지침’등이 하달되는 등 군을 동원할 실질적인 계엄사태가 전개될 형국이었다. 하지만, 당시 권력 친위부대까지 ‘계엄’등에 반발하면서 최고위층에서 군 동원령을 일단 철회했다. 안 장군은 “군 동원 등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내가 정호용(당시 내무장관에서 물러나 쉬고 있었다)씨를 만나, 노 대표가 시국을 해결하지 못하면 군부가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뜻을 전달했다”며 “이에 노 대표가 청와대에 들어가 전 대통령과 만나 군대 동원을 막은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군대 동원이 유보됐다고 상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계속되는 ‘직선제’등 민주화 요구는 좀처럼 사그러들지 않았다.안 장군 등 군부는 다시 노 대표에게 ‘군대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야 했다. 안 장군은 “20일께 나를 포함, 군장성 3∼4명이 서교호텔 인근 음식점에서 노 대표를 만나, 시국을 해결하지 못하면 군대가 나설 수밖에 없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그리고 이에 노 대표는 ‘내가 책임지겠다. 만약 해결하지 못하면 내 등에 칼을 꽂아도 된다’는 말을 하며 비장함을 보였다”고 당시 상황에 대해 밝혔다.그리고, 일주일 후 ‘대통령 직선제’ 등 국민의 요구가 반영된 6·29선언이 발표됐고, 민주화로 가는 첫 시금석이 놓이게 된다.안 장군은 “6·29선언이 없었다면 ‘정권연장에 의한 도구’든, 이에 ‘반대하는 역 쿠데타’ 든 어떤 방식으로든 군대가 동원됐을 것”이라며 “당시 국민들의 민주화 열기와 함께 군부의 민주화 투쟁 역시 현대사를 바꿔 놓은 커다란 힘이 됐다”고 강조했다.칼럼리스트 김진후씨도 “당시 6·29선언은 일부 민주투사들에의해 일궈낸 성과물이 아니다”라며 “온 국민과 이를 뒷받침했던 민주인사들과 당시 군부 등의 힘이 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라며 6·29선언에 대한 진지한 역사적 고찰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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