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일요서울 ㅣ이범희 기자] 새 정부의 재벌 개혁 의지가 강경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장하성 교수를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임명했다. 을지로위원회 성장의 주역인 우원식 의원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로 선출했다.

정경유착과 재벌 특혜, 각종 부정부패와 비리 등 ‘적폐 청산’을 내세운 것도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문 대통령은 후보 시절에도 “단호하게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재벌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 재벌 가운데서도 4대 재벌의 개혁에 집중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재계에서는 벌써부터 새 정부의 강도 높은 재벌 개혁을 예의 주시하는 분위기다.  지난 수십년간 대선 때마다 많은 후보들이 공약으로 내걸었던, 그러나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재벌 개혁, 과연 이번에는 가능할까. 일요서울은 재벌·적폐 청산을 시리즈로 기획했다. 이번 호는 재계 전관예우 논란을 들여다봤다.

대기업 절반 사외이사는 권력기관 출신…거수기 논란 여전
고위 공직자의 대형 로펌행 막을 길 없어…자성 목소리 높아

국내 굴지 기업들 중 올해 새로이 선임되거나 재선임된 사외이사 절반이 권력기관 출신으로 드러나 빈축을 사고 있다.

전직 기관 권력자가 영입되는 것은 기업이 추진하는 사업에 대한 제재가 조금은 자유롭다는 점을 노리는 것으로 사실상 ‘전관예우’를 이용하는 것이다.
삼성과 SK, 롯데, CJ 등 4개 주요 그룹들이 올해 주주총회에서 사법·금융당국, 정치권 전관 출신 사외이사 선임을 늘린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3월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과 대신지배구조연구소 등에 따르면 삼성과 SK, 롯데, CJ 그룹 계열사 54곳은 사외이사 162명 가운데 절반 가량인 78명을 새로 선임하거나 재선임했다.

감사를 포함한 신규 선임 인원을 살펴보면 롯데그룹이 기존 사외이사 30명 가운데 10명을 새로 선임했다. SK그룹은 48명 가운데 14명(29.2%), CJ그룹은 29명 가운데 6명(20.7%)의 새 사외이사를 맞았다. 삼성그룹은 가장 많은 55명의 사외이사를 두고도 9명(16.4)만 새로 선임해 재선임 비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그룹 4곳의 올해 주주총회에서 통과한 신규 사외이사 선임안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금융감독원이나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등 감독기관, 검찰·법원같은 사법기관, 청와대를 비롯한 정치권 등 권력기관 3곳 출신이 늘었다는 점이다.
삼성그룹은 지난해 사외이사 10명을 새로 선임했으나 감독기관·사법기관·정치권 출신은 0명이었다. 올해에는 사법기관 출신 1명, 정치권 출신 2명 등 전관 3명을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공정위 출신 공무원, 대형 로펌행

SK 역시 지난해 한 명도 없던 전관 출신 신규 사외이사를 감독기관 1명, 사법기관 2명, 정치권 1명 등 4명을 새로 선임했다. 다만 롯데그룹의 전관 사외이사는 지난해 5명에서 1명으로 줄었다.

지난해 신규 사외이사를 선임하지 않았던 CJ그룹도 감독기관 출신 사외이사 2명을 새로 뽑았다.
뿐만 아니다. 고위 공직자의 대형 로펌행도 이어지고 있다. 5대 대형 로펌 구성원 중 공정거래위원회 공무원 출신이 52명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공정위 공무원들의 전문성과 함께 ‘전관의 영향력’도 공정위 공무원들의 대형 로펌 행에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달 29일 김앤장·광장·세종·태평양·화우 등 5대 대형 로펌 홈페이지에 공개된 공정거래팀 구성원의 이력을 보면 총원 367명 중 공정위 출신은 52명이다. 이중 세종·태평양 공정거래팀은 공정위 공무원 출신이 무려 30%에 육박했다. 이 중에는 1급 이상 공무원 출신도 다수 눈에 띄었다.

실제 세종에는 노대래 전 공정거래위원장, 김범조 전 조사국장이 고문을 맡고 있고 임영철 전 정책국장은 대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노 전 위원장은 위원장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5대 대형로펌에 속해 있다.

공정위 퇴직 공무원들의 로펌행 자체가 불법은 아니다. 그러나 전관예우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대형 로펌이 공정위 출신 공무원을 영입한 뒤 과징금 인용 실적이 눈에 띄게 개선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되기도 했다.

김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한 대형 로펌이 공정위 과장급 인사를 영입한 뒤 과징금 감경 실적이 대폭 상승했다며 전관예우 의혹을 제기했다. 이 로펌은 해당 인사를 영입하기 직전 2년간 공정위에 낸 과징금 이의신청이 단 한 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공정위 인사 영입 직후 과징금 부과 이의신청 중 5건이 인용됐고 총 76억6000만 원의 과징금을 줄이는 성과를 냈다.

경제 단체 관계자는 “경제검찰이라고 불리는 공정위인사가 퇴직 후 곧바로 로펌에 들어가 로비스트 역할을 하는 것은 문제”라며 “공정위 등 규제 권한이 강한 부처에 대해서는 퇴직 후 재취업 기준을 다른 부처보다 엄격하게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경제계에서는 이들 로펌이 공정위 공무원 출신을 앞 다퉈 영입하는 이유에 대해 그들이 전문성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로 그들이 공정위 조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바람막이 사외이사틀 벗어나야

이에 따른 자성 목소리도 나온다. 징계 처벌 수위를 높여서라도 재계 곳곳에 만연한 전관예우 성격의 불법 관행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것. 또 대기업 사외이사제도가 전관예우 통로로 활용되는 일이 없도록 제도적으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

대기업들이 장·차관, 검찰 고위간부 출신 등을 사외이사로 선임하는 이유는 삼척동자도 안다. 법조 전관예우의 통로이다시피 한 대기업 사외이사로 활동해오면서 법정 절차조차 소홀히 해, 변호사 윤리 훼손을 자초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업계 한 관계자는 "더 이상 권력기관의 사외이사 진출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대기업들은 법조 인맥을 ‘바람막이’로 삼아온 사외이사 선임 방식에서 하루속히 벗어나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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