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류영준 당시 원자력병원 전공의(專攻醫)는 인간 난자로부터 환자맞춤형 체세포 복제 배아줄기세포를 세계 최초로 추출했다며 2005년 '사이언스'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황우석 박사의 논문이 조작됐다고 폭로한다. 류 씨는 황 박사 연구팀 내 2인자였지만 비윤리적 난자 확보 과정과 연구결과의 허구를 확인한 뒤 양심선언을 한 것이다.

영화 ‘제보자’는 류 교수의 내부 고발을 모델로 제작됐다. 영화 속 류 교수는 방송국 PD에게 "당신은 모든 걸 걸고 여기까지 왔지만, 나는 모든 걸 버리고 여기까지 왔어"라고 말한다. 모든 걸 버린 대가는 혹독했다. 직장과 동료를 잃고 가정마저 깨질 위기에 처한다. 그럼에도 그는 PD에게 줄기세포 조작 사실을 제보한다. '배신자'라는 사회적 비난까지 감수한 그는 오직 진실을 위해 모든 걸 버렸다.

영화 '내부자들‘에서는 정치깡패 출신으로 정계와 재계의 온갖 지저분한 일들을 해결해주는 대가로 ’암흑세계의 왕‘으로 군림하던 안상구가 비자금 자료로 거래하다가 오른 손이 잘리면서 폐인이 된다. 그러나 오직 성공만을 쫓던 검사 우장훈을 만나 그와 함께 자신을 그렇게 만든 비리 인사들에게 처절한 ’복수극‘을 펼친다.

류영준 교수와 안상구는 둘 다 진실을 밝히는 내부 고발자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크게 다른 점이 있다. 류 교수는 ‘선(善)의 제보자’고, 안은 ‘악(惡)의 제보자’다.

류 교수는 애초부터 선의 편에 있었다. 불치병 환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줄기세포를 만들어내는 일은 누가 봐도 선하다. 반면, 안은 애초부터 악의 편에 있었다. 정계는 물론이고 재계 및 언론계 비리 인사들과 공생관계를 유지하며 세력을 키워온 조직폭력배다.

또 하나 다른 점은 둘 다 진실을 밝혔지만 하나는 ‘배신자’ 취급을 받고 하나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선의 편에서 진실을 알린 류 교수는 당연히 ‘영웅’ 대접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진실을 밝히자마자 실직하고 말았다. 황 박사의 지지자들로부터는 국익에 반(反)하는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배신자’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안은 진실을 밝힌 후 ‘영웅’이 됐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악행을 저지른 자가 단지 개인의 복수를 위해 추악한 비리만 폭로했는데도 말이다.

영화 ‘제보자’에서 제보자가 보상받는 장면은 없다. 영화 후반부에는 거의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의 영웅적인 행위는 그저 '제보'로만 축소됐다. 그가 치른 희생도 기억되지 않는다. 제보자는 철저히 홀대받았다.

반변 방송국 PD는 언론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음에도 ‘영웅’ 대접을 받았다. 회사와 사회로부터 인정도 받았다. 관객들 역시 제보자보다는 PD의 행위에 열광했다. 곰은 재주가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번 모양새다.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돼 그동안 검찰조사를 받으며 구치소생활을 하고 있던 최순실 씨의 조카 장시호 씨가 8일 석방됐다. 그런데 그의 석방을 두고 일각에서 당연한 처사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어처구니없다.

장 씨는 최 씨의 영향력을 이용해 체육계 전반에서 각종 이권을 챙긴 혐의(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으로 구속 기소됐다. 그런 그가 수사단계에서 최 씨의 태블린 PC를 찾아내 특검에 제출하는 등 협조적인 태도로 임했다는 이유로 ‘국민조카’ ‘특급 도우미’ 등으로 칭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범죄자가 ‘영웅’으로 둔갑한 것이다.

하기야 ‘영웅’이 하루아침에 ‘적폐세력’이 되고 ‘적폐세력’이 ‘영웅’이 되는 일이 어디 한 두 가지겠는가. ‘촛불집회’의 영웅으로 칭송받던 가수 전인권 씨는 대선 과정에서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를 지지했다가 ‘적폐세력’으로 몰리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시절 ‘소통령’으로 군림하며 국정농단의 중심에 있었던 김현철 씨는 문재인 후보를 지지해 ‘환대’를 받았다.

이 뿐인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속을 결정해 ‘영웅’ 소리를 들었던 강부영 영장전담판사는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하자 ‘적폐세력’으로 낙인찍히는 일도 발생했다.

세상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선의의 편에서 진실을 제보한 사람이 불이익을 당하고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인가. 어떻게 평생을 악의 편에 있다가 개인의 복수를 위해 한 순간 진실을 밝히는 자에게 열광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악의 편에 있던 사람이건 아니건 우리가 원하는 진실만 밝혀주면 만사형통이란 말인가. 어떻게 한 때 ‘적폐세력’이었으나 지금은 우리에게 유리한 행위를 하는 자에게는 ‘영웅’ 대접을 해주고 그 반대일 경우 한 때 ‘영웅’이었건 말건 무조건 ‘적폐세력’으로 몰 수 있다는 말인가. 어이없는 세상이다

장성훈 국장  seantlc@ilyoseoul.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