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로 보수 정치 세력의 존립 기반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개혁 보수’ ‘따뜻한 보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경제·사회정책 등에서 ‘좌클릭’을 통한 중도 외연 확장을 꾀하여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을 집단 탈당해 만든 바른정당이 존폐 위기에 빠졌다. 바른정당의 대주주라 할 수 있는 유승민 의원마저 “바른정당이 언제 또 불이 꺼질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유 의원은 새누리당을 탈당하면서 아마 이런 꿈을 꿨지 싶다. 보수 정당이라는 기조를 유지하면서 사회개혁·노동조건 개선·노동계층의 참정권 확대 등의 개혁으로 집권에 성공한 19세기 영국 보수당의 벤저민 디즈레일리 총리와 같은 지도자가 되는 것 말이다. 실제로 ‘안보는 보수, 경제·노동·복지는 개혁’이라는 그의 노선은 디즈레일리 모델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유 의원의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지난 조기대선에서 7%도 안 되는 득표율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그 마저 선거 막바지 13명 재탈당파들의 자유한국당 복당 시나리오 역풍이 몰아준 동정(?)표를 보탤 수 있어서였다.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는 말을 우습게 여긴 탓이다. 그는 개혁의 당위성에 대한 사회 구성원 다수의 이해를 만족시키는 데 실패했다. 
개혁의 성공 여부는 개혁 추진 세력의 단결력에 달려 있기도 하다. 그러나 바른정당의 개혁 추진 세력은 동이불화(同而不和) 그 자체였다. 같은 세력이지만 서로 뜻이 맞지 않다는 뜻이다. 역사적으로 반발 세력을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하고 개혁에 성공한 예가 없다. 유 의원은 반대 세력의 논리를 뛰어 넘지 못해서 대중의 지지를 받는 데 실패하고 배신자 프레임에 갇혀버렸다. 바른정당의 ‘개혁’이라는 단어가 냉소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따뜻한 보수’란 또 무엇인가. 그렇다면 ‘차가운 보수’도 있다는 말이 되는데 어떤 기준으로 나누는지 알 수가 없다. 따뜻하고 차가움을 따지기 전에 보수의 가치가 도대체 무엇인지 깊이 고민이라도 해봤는지 묻고 싶다. 
보수의 적통이라고 자처하는 자유한국당의 보수도 무엇인지 명쾌하게 설명 못하면서 그것과 다른 보수를 선보이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바른정당 일부 의원들은 사실상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서민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그들은 탈당하기 전 새누리당에서 재산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었다. 자기 아버지들이 누렸던 국회의원 지역구를 세습한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재벌의 아들도 있다. 새누리당이 여당 할 때는 호가호위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보수를 보여주겠다는 것인가. 그런데도 유 의원을 비롯한 바른정당 의원들은 마치 자신들만이 보수의 가치를 점유하고 있는 듯 착각하고 있다.
“나는 따뜻한 보수”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가난한 설움을 어루만질 수 있는 덕목은 돼야 한다. 가난과 배고픔을 모르는 사람들, 그리고 ‘갑질’에 멍든 ‘을’ 계층의 아픈 가슴이 어떤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이 ‘개혁보수’를 외치고 ‘따뜻한 보수’를 주장하는 건 사리에 맞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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