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 론 천 국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는 문제를 놓고 아이들 세계에 언쟁이 붙었다. 먼저 알이 있어야 닭이 태어나는 것이지 알 없이 어떻게 닭이 나올 수 있느냐고 핏대를 세우는 아이와 닭 없이 무슨 수로 알이 생겨나느냐고 우기는 아이의 모습이 금세 주먹다짐이라도 벌일 것만 같아 이를 지켜보는 아이들 모두는 한껏 불안해진다. 그러나 아이들 누구도 어느 쪽 말이 맞는 건지 도무지 판단이 안 선다. 그런데도 정작 두 아이는 서로 내 말이 맞지 않느냐고 몰려든 아이들에게 편 들기를 청한다. 이 때부터 아이들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닭이 먼저라는 아이의 편을 들자니 알이 먼저라는 아이의 우람한 체격에 평소 압도당해 왔던 것이 찜찜하고, 알이 먼저라는 아이 편에 서자니 닭이 먼저라는 아이에게 밉보여 늘상 신세진 군것질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서로들 눈치를 살핀다.순간 영악한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이해를 빠르게 저울질한 다음 두 패로 갈라져 자칫 패싸움이라도 일어날 일촉즉발의 상황을 맞고서야 가까스로 누군가의 중재로 씩씩거리며 흩어진다. 이렇게 해서 두 아이의 언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끝이 났지만 그 날 이후 아이들은 철들 때까지 닭패, 알패로 편을 갈라 사사건건 대립해서 으르렁거렸다.

기회주의가 만연한 세상

어른들 세계라고 크게 다르지가 않을 것 같다. 속해있는 조직에서 자신이 눈치를 살펴야 할 막상막하의 두 사람이 의견을 달리하고 논쟁을 벌일 때 참으로 난감할 것이다. 두 사람 주장에 귀 기울여 자기 소신을 표하기보다는 어느 쪽 편에 들어야 내게 득이 될지를 약삭빠르게 계산하는 기회주의가 만연한 세상이다.과거 군사독재 시절 그들 주구들의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니 하는 철권 통치의 괴이한 논리 앞에 당당하게 소신 있는 논쟁으로 맞선 이 땅의 지식인이 얼마나 되었던가. 그 시절 어쩌다가 소신 있는 말 한마디를 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초죽음을 당하기가 일쑤였다.

때문에 국민들은 변절하는 정치인을 일컬어 사쿠라로 매도했지만 입다문 지식인을 향해서는 분노하기 보다 오히려 측은해하는 측면이 짙었다. 다행히 오랜 세월 침묵하며 이심전심으로 뭉친 국민은 염원하던 문민정부를 탄생시켰고 드디어 민주주의 꽃이 만개하는 듯해서 국민의 소리는 시민단체의 입과 언론을 통해 여과 없이 퍼져 나갈 수가 있었다.정부 정책수립 과정에 집단의 이해가 충돌할 때는 거센 논쟁이 빚어지고 지나친 밥그릇 싸움이 국민을 화나고 안타깝게 한 것도 사실이다. 이럴 때 방송사들은 어김없이 양측논쟁을 더한층 극대화시키는 대담 프로를 방영한다. 언필칭 국민의 바른 이해를 돕기 위함이라고 했다.

논쟁만 있고 대화는 없다

이 같은 토론 문화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 후 가일층 해서 가히 토론 천국이 도래한 듯하다. 하지만 실상이 어떤가. 밤늦도록 토론한답시고 양측 선발 주자가 마주앉아 물고 뜯는 밑도 끝도 없는 언쟁을 보고있는 시청자들은 짜증만 나고 쉬어야할 시간대에 스트레스를 더한다는 역반응이 만만치가 않다. 그럴 것이 지금의 우리네 토론 문화는 서로의 의견을 개진시켜 장단점을 논의하고 상대를 수용해서 합의점을 도출해낼 뜻은 애초부터 없다. 오로지 저쪽 논리를 압박해서 굴복시키겠다는 전의만 불태울 따름이다.

그럼에도 방송 매체들은 마치 즐기기라도 하듯이 앞다투어 언쟁의 장을 더욱 늘리고 부추겨서 국론 분열에까지 기여(?)코자 한다.토론은 분명 필요하고 따라서 논란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논쟁 아닌 언쟁으로 온 나라가 싸움판이 되어 좀처럼 대화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지금 이 나라가 싸움으로 지새우고 나는 너에 비해 훔친 것이 10분의 1을 넘지 않는다며 이제 또 큰 도둑놈 작은 도둑놈을 따질 때인가 . 그나마 나라꼴이 되려면 빨리 정치권부터 언쟁의 앙금을 털고 논쟁 아닌 대화를 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논쟁만을 일삼다가 국가존망의 위기를 맞은 역사적 교훈을 무수히 안고있는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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