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웅 기자> photo@ilyoseoul.co.kr
- 외부의 적이 아닌 사회 내부에서 발생한 테러
- 서로를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문화 조성해야


요즘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테러집단은 IS다. 서구권에서 사건이 일어나면 우리는 IS가 배후인지를 의심한다. 이런 상황이 한국인들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다. 해킹 사건 하나가 발생해도 북한이 배후인지를 의심하면서 살아온 게 우리 현대사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국방부 등 관계 부처가 지나치게 모든 사건의 배후로 북한을지목한다는 불만마저 나오는 한국 사회였다.

아직까지 IS는 한국을 주 타깃 대상으로 삼지 않고 있다. 이미 북한이라는 외부의 적을 가진 한국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외부의 적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난 13일 연세대 공과대학에서는 교수를 겨냥한 ‘텀블러 폭탄’이 터졌다. 사제 폭탄을 만든 이는 이틀 후 대학원생으로 밝혀졌다. 교수에게 심한 질책을 받은 후, 살해를 노린 것은 아니지만 다치게 싶어 하는 마음에서 저지른 범행이라고 했다.

그 며칠 전인 지난 8일에는 경남 양산의 한 고층아파트 단지에서 밧줄에 매달려 외벽 도색작업을 하던 작업자가 휴대전화로 음악을 켜놓자 한 주민이 시끄럽다는 이유로 밧줄을 끊어 추락사하게  한 사건도 있었다.

대학원 내 ‘갑을 관계’
임계점 노출


두 사건의 방향은 다소 다르다. 연세대 사제 폭탄 사건은 ‘갑’(교수)을 향한 ‘을’(대학원생)의 폭력 행동이었다. 양산 아파트 사건은 경우가 다르다. 강약관계가 확실하게 정리되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아파트 주민이 작업자에 비해 계층적 위치가 나은 걸로 추정할 수 있다.

주민은 자신을 소비자 내지 고객으로 생각하고 ‘갑’질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두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만연한 갑의 횡포와 함께, 그 갑의 횡포에 신음하는 을들의 분노가 임계치에 도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유형의 테러는 IS 같은 조직적 테러나 북한의 무력도발에 비해선 사상자가 적어서 심각한 문제로 인지되지 않기 십상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선 더 문제적이다. 이는 사회 외부의 무력 조직의 존재가 아닌, 사회 내부의 파탄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외부의 적에 대처하는 것보다 어쩌면 더 근본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한국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안전한 곳이 아닐지 모른다는 예감은 거의 모든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것이다.

지난 2014년엔 황선 씨와 신은미 씨가 진행하던 토크 콘서트에 한 고등학생이 사제 폭발물을 투척한 사례도 생겼다. 두 사람의 토크 콘서트는 종편 방송에 의해 ‘종북 콘서트’라는 비난을 받은 것이었다. 이렇게만 본다면 이 사례는 이념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십대 후반 소년에게 그 이념의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소년은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드디어 인생의 목적을 발견했다”는 글을 올리며 범행을 결심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결 역시 이념 논쟁보다는 앞서 언급한 사건들처럼 한국 사회 내부의 문제에 해당한다. 십대 후반 소년에게 삶의 의미를 주지 못하는 사회, 증오와 분노의 이념적 선동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착각할 법한 사회에 우리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층층상하 계단같은
대한민국 사회


현재의 한국 사회는 층층상하의 계단과도 같다. 이 계단 구조에서 한 칸이라도 위에 있는 사람은 그 아래를 철저하게 벗겨먹어야 간신히 살아갈 수 있다는 식이다. 그러나 다만 경제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소비자의 위치에 서면 알바생을 굳이 무릎 꿇려야 하는 심리는 경제적인 면을 초월한다.

자신의 자존감을 위해 서로가 서로를 무시하면서 “네가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냐?”라고 드잡이질 하는 것이 현재의 한국 사회다. 갑조차도 을에게 그러하니 계단 아래 서 있는 을들의 분노는 이미 임계점을 넘었다. 어쩌면 연세대 공대 교수는 정말로 본인이 설명한 것과 같이 대학원생에게 그리 심한 훈계를 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심한 훈계를 받더라도 항의할 수 없는 구조 안에 있던 그 대학원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튼이 눌렸다’. 그리고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이쯤 되면 우리는 이들을 일탈하는 개인으로 바라보아선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특출난 정서를 가진 패륜적 인간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일그러진 감수성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여기엔 사회경제적 문제가 기반으로 작용하지만, 그와 별도의 문화적 문제까지 응축해 있다. 고도성장 시대가 끝난 이후 주변 사람들을 착취해야만 본인이 잘 살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사회가 전반적으로 성장할 때엔 “네가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냐?”라는 드잡이가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 정서로 열심히 일하면 사회도 나도 함께 올라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스컬레이터가 상승에서 하강 단계로 진입했을 때, 그러한 욕망들의 총합은 아수라장을 만들게 된다.

이제 우리는 이 아수라장을 직시해야만 한다. 실은 유럽 사회의 IS 문제라는 것도 단지 외부 적의 문제는 아니다. 유럽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은 아랍계 사람들이 유럽 사회에 실망하고 IS의 폭력적 선동에 쉬이 동의하게 되는 그 상황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회는 외부의 적 때문이 아니라 내부의 균열 때문에 무너진다. 적어도 이러한 문제들을 직시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사회라야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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