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이창환 기자] 7월 2일을 끝으로 막 내리는 연극 <프라이드>는 세상이 반대하는 사랑을 다룬다. 자신을 간절히 거부하고 거부해왔으나 그보다 더 간절히 사랑을 찾고 원하는 성 소수자를 다룬다.
 
<프라이드> 대사는 아름답고 한 사람의 고통과 고독을 손에 잡힐 듯 비춘다. 사랑과 정체성 사이에서 헤매는 성 소수자의 고백은 눈앞의 대상을 향한 일말의 사랑임에도 사랑을 넓히고 본래 의미로 향한다. 평등, 인권과 모더니즘까지도 사랑에 포함되고 있음을 알린다.

보통 사람들에게 동성애는 호기심, 자기 만족적 이해, 유행과 비슷한 예술 장르로서 일부 소비된다. <프라이드>는 퀴어 문화 소비의 흐름을 일부 수용하고 또 거스른다. <프라이드>는 1950년대의 필립, 올리버, 실비아의 관계를 들어 어떤 사랑(필립)은 침묵이며 보편성을 가장한 껍데기며 ‘내 영혼이 이미 길을 잃었음을 확인’하는 과정임을 전한다. 진실을 담아 불러도 목소리는 그에게 닿지 않고 그도 자신을 부르지 않는다. <프라이드>는 ‘손안에 사랑하는 것들은 죽어가는 데 바라볼 줄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실비아 대사로 누군가에게 관해 이해할 수 있는 건 이해할 수 없다는 것뿐이라는 광경을 그린다. 관객들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을 사랑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감정이입하지만, 나중에는 ‘잘못된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새롭고 어렵게 실감한다. 대상이 다를 뿐 사람은 모두 같다는 보편적 이해는 사랑을 지대하게 파헤치는 <프라이드> 속에서 다소 분리된다.
 
<프라이드>는 동성애자들의 기억과 경험과 상처와 쾌락의 끝은 혼란이며 혼란이 그 어떤 것도 집어삼킨다는 것을 보인다. 연극에서 동성애는 사랑을 갈구하거나 두려워하는 인간상을 묘사하기에 알맞다. 그들이 사랑하기 위해 부딪쳐야 할 것은 역사적이고도 전체적인 군중의 시선 외에 커밍아웃을 거부하는 사랑 자체에도 있다.
 
사랑의 다른 말인 성욕은 <프라이드>에서 시계추처럼 좌우로 오간다. 보통 사람의 시계추가 보호 안에서 흔들리는 반면 성 소수자의 시계추에는 위로와 보호가 없다. 1950년대 필립과 올리버는 평소 성욕 같은 게 없어 보인다. 그들은 진중하나 다정다감하고 쓸쓸하나 밝다. 그들은 지친다. 어느 날 사랑이라 부르고 싶은 욕망, 과거와 현재와 온몸의 모든 게 하나가 되는 순간이 찾아오지만 결국 괴로워하고 수치스러워한다. 혼란에 빠진다.
 
<프라이드>는 사랑의 개별성과 불가능성을 내세운다. 그리고 주관적으로 사랑의 의미를 단련시킨다. 최근 공연한 연극 <생각은 자유>에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퀴어 연극에는 연민은 있으나 연대가 없다. 성 소수자 연극이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연대를 담아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연민과 연대를 함께 담은 <프라이드>는 1950년대와 2010년대를 각기 사는 두 올리버를 매개로 이를 구체화한다.

먼저 2010년대 올리버는 오럴 섹스 중독자다. 으슥한 공원에서 공중 화장실에서 모르는 남자와 수시로 오럴 섹스를 한다. 1950년대 올리버 역시 공원을 배회하는 오럴 섹스 중독자들을 간절히 지켜봤다고 고백한다. 과거의 올리버가 하는 고백은 성욕과 정체성의 고백이며 자기혐오와 자기애의 대립이다. 1950년대 올리버는 공원에 있는 남자들을 멀찍이서 지켜봤고 2010년대 올리버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두 올리버 모두 유머러스하고 감수성이 풍부하며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 쉽게 가질 수 없는 활기까지 지녔다. 올리버를 향한 <프라이드>의 시선이다. 과거 올리버는 ‘짐승처럼 공원을 배회하는 그들조차도 언젠가 자신 앞에 나타날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며, 그들은 더 외로운 것’이라는 연민을 보낸다. 그리고 현재 올리버는 무뎌지고 망가진 그들과 연대한다. (물론 연인 필립을 위해 공원에서의 성행위를 끊기로 다짐하나 그들 자체를 부정하고 혐오하진 않는다.)
 
<프라이드>는 동정할 가치를 얻지 못하는 일부 동성애자들에게 연민을 보낸다. 성이 씻을 수 없는 상처와 폭력으로 연결되는 현실에서 이 대목은 나약하다. 그러나 성 소수자만의 역사와 이야기 속에서는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부분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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