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보러 가고 싶다는 것은 단순한 바람에 그치지 않는다. 먼 바다에서  불어오는 새벽녘의 바람을 맞고 그곳으로 다시 밀려가는 오후의 잔잔한 파도를 보며, 다시 그 끄트머리로 떨어지는 저녁 무렵의 선셋과 밤 별을 보는 것. 그러니까 그것은 바다와 함께 온전히 하루를 보내는 것과 같다. 라농과 까오락 그리고 끄라비에서 보낸 완벽한 추억 그리고 완전한 기억들을 꺼내 보는 시간.
 
가끔은 새로워야 한다. 익숙한 것들과의 의도적인 이별, 때로는 그것이 삶의 결정적인 힌트가 되며 중요한 분기점을 이룬다. 리뉴얼이 필요하고 리셋팅이 절실하며 릴렉스와 리프레쉬는 무엇보다도 간절한 신체적, 감정적 행태이다.
 
그런 바람은 먼 남쪽에서 불어오는 또 다른 바람과 맞닿아 어느덧 태국의 서남쪽 바다로 이끈다. 물론 많은 사람들로 북적일 필요는 없다. 크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래서 풍성한 순수함이 있고, 맑고 투명한 바다는 눈이 부시지만 기분 좋게 찡그릴 수 있는 태양과 맞물려 지중해보다 푸른 에메랄드 빛 세상을 그려준다.

미얀마와 가까워 국경이라는 그것도 바다를 통한 경계가 있는 묘하고 이국적인 라농이 있고 순박한 까오락이 있으며 이름에서 환기되는 것처럼 부드러운 코발트블루가 연상되는 끄라비가 있다. 꿈꿔왔던 나날들을 완성시켜 주는, 곧 다가올 여름을 보내야 할 세 곳.

라농(Ranong)

하루에 단 두 번. 방콕에서 태국 전역으로 뜨는 셀 수 없이 많은 비행기들 중 라농에 내리는 횟수다. 아직 크게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작은 세계. 게다가 태국 남서쪽의 안다만 바다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지리적인 뉘앙스가 더해지면 이미 라농은 벌써부터 마음속 깊은 곳에 머문다.

방콕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여, 라농에 내려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는 것은 의외로 맑고 저 오랜 시간이 길어 올린 깊은 공기이다. 바다와 가깝지만 비릿한 물의 서정보다는 폐부 깊숙이 묵묵한 흙과 땅의 정서가 먼저 반긴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순수함과의 조우. 숲을 넘어 밀림에서부터 전해 오는 은은한 풀과 나무들이 그려내는 풍경 그리고 그것들을 받쳐주고 있는 라농이 지닌 태초의 자연의 냄새.

아마도 이곳 라농 사람들의 삶의 향기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먼저 손을 내밀어 그것들과 악수했다. 손에 남아 있던 습기는 어느덧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사라지고 난 후였다.

라따나 랑산 궁전

라마 5세를 빼놓고 현 시대 태국의 역사를 논할 수는 없다. 태국의 근대화 기틀을 다졌으며 차크리 왕조 역사상 최고의 군주로 칭송받는 라마 5세.

얼마 전 태국 국왕이 서거해 태국 전역의 국민들이 슬픔으로 애도했지만 아직까지 라마 5세에 대한 태국 국민들의 추앙과 존경심은 거의 신앙에 가깝다. 라따나 랑산 궁전은 라마 5세의 방문을 기념해 1890년에 세워진 별장 형식의 궁전으로 이후 1928년까지 라마 6세와 7세의 방문을 통해 증축됐다.

가장 단단한 수종 중 하나인 철목과 티크목으로 만들어졌으며 잘 다듬어진 정원과 함께 꾸며져 있다. 내부에는 라마 5세의 침실 및 각종 전시물들이 보관돼 있어 당시 태국 왕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푸 까오 야

자그마한 공항을 빠져나와 한적한 도로를 달리다  보면 평원에 야트막한 동산이 하나 눈에 띈다. 태국어로는 Phuh Kao Ya. Grass Hill이나 Bald Hill 또는 유령 언덕과 스위스 초원 등 다양한 이름을 지니고 있는 작은 민둥산이다.

유독 산악 지형이 많은 라농뿐 아니라 태국 전체에서도 이처럼 풀로만 덮인 채 나무 한 그루 없는 상태로 유지되고 있는 언덕은 꽤 드문 형태라고 한다.

바로 앞에 울창한 삼림으로 뒤덮인 드넓은 응가오 국립공원이 있음을 감안할 때 아직 싹이 올라오지 않아 밋밋한 생김새는 확실히 주변의 빽빽한 초록 풍경과 비교해 이질감이 있었다. 흡사 경주의 거대한 왕들의 무덤인 대릉원이 연상되는 곳.

수천 년 전 라농 왕가의 무덤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비밀스런 민둥산은 그보다 더 찬란한 이름으로 불려도 좋다. 언덕 뒤로 트레킹 코스가 있으며 목초지 주변으로 소떼가 방목돼 라농 사람들의 피크닉 장소로도 쓰이는 푸 까오 야. 라농의 여유로움은 벌써부터 넓게 펼쳐졌다.
라농 마켓

시장은 생각 외로 무척 크고 넓다. 라농이 그리 크지 않은 도시임에도 이런 규모의 시장이 있는 이유는 바로 옆 나라인 미얀마와 삶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라농 사람이 미얀마로 건너가 사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미얀마 국경지대의 사람들은 라농으로 넘어와 뿌리를 내리고 완전히 정착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라농 마켓은 그래서 태국 본래의 모습과 태국 남부인 이슬람권 그리고 미얀마 문화가 모두 혼재돼 있으며 시장 바로 옆 중국 사당까지 더해져 다양한 군상을 이룬다. 바다가 옆에 있기에 풍부한 해산물이 어디든 넘쳐나고 공장지대 하나 없는 라농의 땅에서 난 싱싱한 유기농 재료들이 산을 이룬다.

모자람 없이 넉넉한 모습. 그래서 여타 수많은 다른 시장에서 느꼈던 치열하거나 복잡함이 없는 공동체의 형태. 어쩌면 라농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다.
 
      락사 와린 온천

숲 속에 있는 온천. 덥고도 더운 나라에서 온천이라니 다소 의아하지만 태국 전역에는 자연에서 생성된 온천이 꽤나 많다. Father, Mother & Child로 이름 지어진 세 곳에서 뿜어 나오는 온천은 치유의 효과도 있어 주변은 물론 인근의 춤폰이나 더 먼 곳에서도 찾는다고 한다.

노천 온천으로 가장 높은 온도는 65도. 온천수는 신성하게 여겨져 얼마 전 서거한 국왕의 60세 생일 축성수로 사용되기도 했다. 족욕탕 시설이 있어 가볍게 족욕을 즐길 수도 있다. 사용료는 무료.

꼬파얌

태국어로 꼬는 ‘섬’을 뜻한다. 꼬창, 꼬사무이, 꼬따오 등등 낯설지 않은 섬들은 이미 충분히 익숙하다. 파얌은 ‘시도하다’를 의미해서 자연스럽게 꼬파얌은 ‘섬에 한 번 가볼까’라는 뜻으로 풀이되니 이 낭만적이고 심지어 시적이기까지 한 섬을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안다만의 바다를 볼 수 있다면. 20여 명을 태운 쾌속선은 선착장을 떠난 지 40여 분이 지나 꼬파얌에 닿는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바람은 세지만 유쾌하고 상쾌하며 그래서 뜨거운 볕에 대해서 거부감이 없다면 선실 내부에서 밖으로 나와 바닷바람을 맞는 것도 좋다.

라농에 속해 있는 섬들 중 꼬창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섬이며 육지와는 3km의 거리 그리고 태국의 섬 중에서 가장 아름답지만 아직 크게 알려지지 않은 섬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섬에 내리면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커다란 트랙터가 대기하고 있다. 아직까지 이 섬에는 교통을 위한 도로가 갖춰져 있지 않은 까닭인데 오히려 섬의 정취와 닮아있어 반갑다. 물론 섬에는 아직 버스나 자동차가 없고 오토바이가 주요 수단이다. 매연이라곤 없는 꼬파얌.

섬에 도착한 사람들은 누구나 이곳에서 도시와는 다른 숨을 마음껏 쉴 것이다. 숙소에서, 아니 이 섬에서 할 일이란 크게 없다. 섬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덕목 중 하나는 섬이 스스로 보여주는 바다와 그 바다를 담은 풍경을 보는 일. 잔잔한 바다는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사실 바다는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빛에 따라 또 구름의 물결에 따라 그리고 바람에 따라. 섬에서 들리는 소리에도 집중할 필요가 있다. 파도에 모래가 쓸리는 소리. 촘촘한 야자수 잎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마치 수 천 마리 새들의 날갯짓처럼 들리는 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섬의 소리. 이 섬이라는 작은 공간에 가득 찬 꼬파얌의 앙상블. 섬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숙소에 미리 예약을 하면 트랙터 투어를 할 수 있다. 부두 반대쪽으로 야트막한 산을 넘으면 또 다른 리조트들이 있기에 가급적 더 한적한 해변으로 향한다. 트랙터는 좁은 산길을 따라 언덕을 넘는다.

간간이 얼굴에 부딪히는 나뭇잎들은 오히려 싱그럽고 역시 드문드문 이 길을 교차하며 만나는 꼬파얌 사람들과의 손 인사가 정겹다. 안다만이 보이는 서쪽의 아오 야이. 꼬파얌에서 가장 큰 베이인 아오 야이는 완만하게 펼쳐진 백사장의 길이가 무려 3km에 이른다. 해변은 물이 빠졌을 경우 바다까지 300m로 더 벌어져 가뜩이나 한적한 해변을 더욱 넓은 공간으로 꾸며준다.
     긴 백사장을 따라 걷는 두 명의 사람. 해수욕을 하는 아이들 그리고 그저 바다를 바라보는 몇 몇의 사람들. 꼬파얌이 밑그림을 그리고 아오 야이가 색을 입힌 라농의 수채화.

트랙터는 다시 반대편으로 넘어가 한 사원에서 멈춘다. 플로팅 템플. 길게 바다 쪽으로 나 있는 다리 마지막 지점에 위치해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불교사원이다.

기본적으로 불교 국가인 태국이지만 라농을 기준으로 해서 남쪽으로 이슬람권으로 바뀌는 종교적 환경 때문에 이 불교사원은 태국 불교의, 특히 남부지역 섬 불교사원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더욱 특이한 장소에 지어졌으며 때문에 신성하게 여겨진다. 사원 내부는 불상만이 존치돼 있을 정도로 크게 꾸며지지 않았다.
     꼬파얌 사람들의 소박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장소. 바다 그리고 그 바다의 다리 끝에 있는 사원. 이 플로팅 템플이 서쪽에 있어 석양이 지는 안다만에 실루엣처럼 서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미친다.

그랬다면 꼬파얌은 아마도 지금의 꼬파얌이 아니었겠지. 날이 바뀌고 바다 건너 다른 섬의 산 위로 해가 뜬다. 선셋과는 비슷한 색감이지만 다소 다른 톤의 붉은 색이 바다에 퍼진다. 저녁과는 또 다른 평온한 아침을 펼쳐주는 꼬파얌의 선 라이즈. 이 작은 섬이 참 많은 것을 가졌다.
 
    국경의 서쪽, 미얀마

라농이 가진 여행지로의 이점 중 하나는 미얀마를 다녀올 수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만해도 외국인은 육로를 통해 미얀마에 들어가기가 어려웠지만 현재는 몇몇 곳에서 육로 루트 이용이 가능해졌다.
   라농에서는 특히 바다를 통해 물길을 따라 국경을 넘는다는 것인데, 묘한 긴장과 흥분 그리고 기대감과 낯섦이 동시에 공존하는 길이다. 많은 미얀마 사람들은 미얀마보다 경제 여건이 좋은 태국으로 와서 일을 하고 또 돈을 벌어 돌아간다.

보통 주변국들과 관계가 그리 좋지 않은 나라들이 많지만 태국과 미얀마의 관계는 그다지 나쁘지 않다. 같은 불교 국가 그리고 같은 물을 나누는 사람들. 공존이라는 단어가 가장 이상적으로 스며드는 땅이자 바다, 그 경계 끄라부리 강. 약간의 비자 비용을 내면 국경을 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크지 않은 목선을 타고 강에 몸을 싣는다. 선착장이 끄라부리 강의 하구에 위치해 다소 물살이 염려되기도 하지만 그다지 심하지 않은 파도를 타고 배는 미얀마 쪽으로 향한다. 태국 쪽 관리소와 미얀마 쪽 관리소에서 두 번 더 여권 확인을 한 후에 비로소 미얀마 땅, 꼬따웅을 밟는다.
   태국 측 체크 포인트에는 태국 군인들이 있지만 미얀마 측 검문소에는 그다지 긴장감이 없다. 미얀마 쪽으로 가까워질수록 황금 칠을 한 불상의 모습들이 보여 과연 미얀마 땅에 들어왔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지구상에서 불교가 삶 속에 가장 깊게 뿌리 내린 나라 중 한 곳인 미얀마.

불심이 깊은 땅이니 낯 선 곳이지만 아무런 걱정이 없다.
   비자의 유효 기간은 단 하루 동안이다. 대사관을 통해 받는 것이 아니라서 한정이 있다. 미얀마 쪽 선착장에서 나와 바다를 따라 가볍게 미얀마를 담아본다. 방금 전에 있었던 태국의 땅이 거대한 물을 사이에 두고 바다 건너에 있다. 국가를 넘어왔지만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크게 다를 이유가 없는지라 어떤 이질감은 없다.
   다만 미얀마 사람들이 얼굴에 바르는 전통 화장품인 타나까를 분한 사람들이 미얀마 사람임을 알린다. 태국보다 조금 힘겨운 삶을 사는 미얀마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얼굴에서 어떠한 힘겨운 기색을 느낄 수는 없다.
   불교 아래에서 삶의 틀을 만들고 그 안에서 생을 해결하는 태국과 미얀마 사람들. 그들의 지극히 종교적인 삶에 경의를 표한다. 먼저 도착한 곳은 끄라부리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자그마한 정원. 미얀마와 라농은 같은 위도 상에 있지만 왠지 자라고 있는 나무와 꽃이 라농과 사뭇다른 느낌이다.

<사진=여행매거진 Go-O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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