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과 동생 싸움에 69년 한 우물 판 아버지 밀려나…

<정대웅 기자>

[일요서울 ㅣ 이범희 기자] 형과 동생이 아버지의 재산을 두고 다툰다. 둘 중 하나는 물러나지만 그 과정에서 회사와 가족은 파탄을 맡는다.

방송에서 자주 사용되는 이야기 전개다. 재벌 오너일가가 그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고 실제 이런 기업들이 등장해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한다. 최근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 총괄회장의 갑작스런 퇴진도 우여곡절 드라마 한 편을 보는 듯 씁쓸함을 자아낸다.

배경 또한 롯데 (오너)왕국이다. 롯데 창업주이자 두 아들의 아버지 신격호 총괄회장은 지난달 24일 롯데그룹 지주사인 일본 롯데홀딩스 이사직에서 물러났다. 1948년 롯데를 창업한 이후 약 69년 만이다.

신 총괄회장의 성공을 말할 때 ‘껌 하나로 세운 롯데왕국’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껌은 롯데의 시작이다. 롯데그룹에 따르면, 집무실인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34층 책상 위에는 처음 정신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늘 롯데껌 3~4개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신격호 시대’는 2015년 7월 불거진 장남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간 경영권 분쟁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신 총괄회장은 홀딩스 대표이사 회장직에서 전격 해임되는 수모를 겪었다. 재계는 신 총괄회장의 퇴진으로 재벌 1세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껌 대감’ 신격호 씁쓸한 퇴장에도 분쟁 불씨는 여전
신동빈, 롯데월드타워로 집무실 옮겨…잠실시대 개막

지난달 26일 롯데그룹에 따르면 일본 롯데홀딩스는 지난달 24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신 총괄회장의 이사직을 연장하지 않았다. 최근 일본 롯데홀딩스 이사회가 올린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을 포함한 이사진 8명의 재신임 안건에서 신 총괄회장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홍에 결국 퇴장

신 총괄회장의 공식 퇴임 이유는 ‘고령’이다. 그는 한국법원으로부터 한정후견인 지정판결을 받으며, 경영권을 행사할 건강상태가 아니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신 총괄회장은 최근 롯데제과ㆍ호텔롯데와 롯데쇼핑의 이사진에서도 잇따라 퇴진했다. 이날 일본 롯데홀딩스 이사진에서도 물러나며 남은 롯데그룹 계열사 이사직은 롯데알미늄이 유일하다. 그러나 롯데알미늄마저도  오는 8월 임기만료로 퇴진이 유력하다. 사실상 롯데그룹 경영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이다.

한국 현대 경제사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신격호 총괄회장이다. 맨손으로 롯데를 키워낸, 재벌 대기업 창업주 중 한 명이며, 1세대 창업주 중 가장 늦게까지 경영 일선을 누볐다.

신 총괄회장은 1921년 울산에서 5남 5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농업학교를 졸업해서 종축장 기사로 일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결국 야망이 가득했던 21살, 부인과 가족을 뒤로하고 맨몸으로 일본으로 건너갔고 와세다 대학에 다니면서 우유와 신문 배달을 했다. 공부와 생계 양쪽에서 동분서주하던 신 총괄회장의 성실함을 본 한 일본인이 ‘하고 싶은 걸 화끈하게 해보라’며 투자를 권유했다.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세숫비누, 세탁 세제 같은 생필품을 만들어 팔았고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다. 그 자본을 바탕으로 (1948년) 일본에 차린 게 ‘주식회사 롯데’다. 바로 이 롯데의 시작엔 다름 아닌 ‘껌’이 있었다.
껌은 말 그대로 대박이 났다. 신격호 회장은 껌으로 출발해 지금 잠실의 롯데월드타워, 123층 건물까지 쌓아 올린 것이다.

1959년부터 한국으로 사업을 확장한 신 회장은, 1967년 한국에 ‘롯데 제과’를 설립했고 그것이 ‘롯데 왕국’의 시발점이 됐다. 이후 1973년 소공동 롯데호텔을 선보이면서 관광업에, 6년 뒤에는 소공동 롯데백화점을 개장하면서 유통업에 진출했다.

그 이후로도 여러 분야에 두루 진출한 롯데그룹은 오늘날 국내 재계 서열 5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2015년 장남과 차남의 경영권 분쟁, 이른바 ‘롯데 왕자의 난’이 시작되면서 신 총괄회장의 시대는 저물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지난달 24일 열린 주총에서 그동안 동생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경영권 분쟁을 벌였던 형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이 상정한 본인을 포함한 4명의 이사 선임안과 신동빈 회장 등 현 경영진의 이사직 해임안은 부결되면서 동판 퇴진하는 모습이 연출됐다.

롯데그룹은 명실상부하게 신동빈 회장이 2세 경영자로 자리하며 기업 내부를 재점검하고 그룹을 쇄신하는 작업을 이어갈 전망이다.
향후 지주사 전환 등 기업 개편작업 역시 ‘신동빈 체제’ 중심으로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신동빈 회장은 이달 잠실 롯데월드타워로 집무실을 옮긴다. 이번 이전은 단순 이사가 아니라는게 업계의 중론이다.
롯데그룹에 따르면 신 회장과 경영혁신실, 4개의 BU(Business Unit) 집무실이 오는 17일부터 동시에 롯데월드타워로 이전한다.

신격호 총괄회장이 1979년 소공동에서 롯데백화점과 롯데호텔을 연 뒤 소공동은 40년 가까이 롯데그룹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소공동 시대가 완전히 저물고 신동빈 회장의 잠실 시대가 문을 연다는 의미다.  다만 신 전 부회장이 보유한 일본 롯데홀딩스 지분이 여전히 많아 당분간 경영권 다툼은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재벌 1세대 마침표

한편 10대그룹 창업자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로 꼽히는 신 총괄회장이 경영에서 물러나면서 국내 재계 1세대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고 구인회 LG그룹 명예회장, 고 최종현 SK그룹 회장, 신격호 회장, 고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등이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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