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졸→경단녀→비정규직… 기업들 “찍힐까 봐”

<뉴시스>

 [일요서울 ㅣ이범희 기자] 정권이 바뀌면 많은 것이 변화한다. 기업도 변화의 깃발을 든다. 새 정권이 내놓은 정책에 부응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최소한 미운털이 박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새 정부 눈에 들려 노력한다. 자칫 밉보이면 사정당국의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사실상 구색 맞추기라며 혀를 내두른다. 이번에도 역시 재계는 문재인 대통령과 코드를 맞추기 위한 행보를 보인다. 

키워드는 ‘비정규직’이다. 앞서 MB정부때는 ‘고졸’, 박근혜 정부에서는 ‘경단녀’가 키워드였다.

“줄 잘 대면 5년이 편하다” 씁쓸…취준생만 피해
 일자리委, 우수사례 발표…“유통 3사 8만여 명 채용”

지난달 26일 일자리위원회는 일자리 창출과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약속, 노동계의 양보 등 일자리 창출 우수사례를 발표했다.

일자리위 측은 “문 대통령이 22일 일자리위 회의에서 ‘일자리 만드는 데 도움을 준 기업 및 노동계 양보 사례 등을 널리 알려달라’고 지시해 이를 공유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재계, 비정규직 채용 계획 줄줄이 발표

민간 기업들이 발표한 신규 채용 규모는 8만8000명이다. 신세계그룹은 5월 말 그룹 및 파트너사를 합쳐 올해 1만5000명을 채용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롯데그룹은 5년간 7만 명, 현대백화점은 올해 2600명의 신규 채용을 각각 약속했다.

SK브로드밴드는 자회사를 공식 출범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나선다.
SK브로드밴드는 초고속인터넷 및 IPTV 설치·AS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자회사 홈앤서비스를 공식 출범했다고 지난 3일 밝혔다. 홈앤서비스는 기존 비정규직이었던 설치ㆍAS 기사를 정규직으로 편입시켜 고용 안정을 도모할 방침이다.

홈앤서비스는 ▲7개 실·본부 ▲9개 담당 ▲82개 팀·센터 조직으로 구성됐다. 전체 103개 홈 센터 중 위탁계약 종료에 합의한 98개 센터의 직원을 대상으로 정규직 채용절차를 거쳐 약 4600명의 구성원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홈앤서비스는 구성원들의 처우개선은 물론, 역량 강화를 위한 체계적인 육성 프로그램을 마련해 대고객 서비스 경쟁력을 높인다는 계획이다. 특히 IPTV, 인터넷, 전화 등 기존 서비스뿐만 아니라 AI, 홈 IoT, 홈 시큐리티 등 홈을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신규 서비스도 맞춤형으로 제공할 수 있는 전문 역량을 갖추겠다는 포부다.

유지창 홈앤서비스 대표는 “고객 접점 구성원의 역량 향상과 자긍심 고취를 통해 서비스의 질적 개선을 이루고 고객의 만족도를 높여 홈 서비스의 본원적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할 계획”이라며 “홈앤서비스의 공식 출범이 대고객 서비스 경쟁력을 한층 더 높이는 전환점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공공기관도 현 정부의 정규직 전환 정책 발맞추기에 나섰다. 지난 3일 경기도와 경기도의회에 따르면 도와 도의회, 경기도문화의전당·경기도일자리재단·경기관광공사·경기복지재단 등 4개 산하기관은 오는 18일 ‘공공기관 간접고용근로자 고용안정과 차별 개선을 위한 정책협약(MOU)’을 맺는다.

지난 1월 경기도체육회가 도 산하기관 중 최초로 관리 근로자를 직접고용으로 전환한 데 대해 도와 도의회가 환영 입장을 밝히고 간접고용근로자의 고용 여건을 개선하자는 목소리가 모인 것이 계기다.

이에 도와 도의회, 산하기관 등은 2~6월 간 정규직 전환 관련 간담회와 고용 개선 추진협의회 등을 진행해 협약을 구체화해나갔다.

정책협약서에는 도, 도의회, 4개 산하기관이 비정규직 채용을 억제하고 비정규직 근로자에 대해 직무 분석을 거쳐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또 간접고용근로자에 대해서는 직접고용으로의 전환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기로 했다.

비정규직 및 간접고용 근로자의 직무가 같을 시 동일한 임금과 처우를 보장해 차별적 처우를 받지 않도록 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번 협약이 체결됨에 따라 4개 기관은 비정규직 간접고용근로자를 순차적으로 직접고용 무기계약근로자(정규직)로 전환할 방침이다.
대상자는 경기도문화의전당 38명, 경기도일자리재단 12명, 경기관광공사 6명, 경기복지재단 2명 등 총 58명으로 각각 시설관리, 경비, 미화, 비서 등 분야를 담당하고 있다.

기업들 “취지 공감…사실상 구색 맞추기”

일각에서는 새 정부가 유통 대기업의 불공정거래 등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움직임을 보이자 업계가 선제적으로 화답한 결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 대기업 인사담당자는 “정부 눈에 나지 않으려고 동참하는 거죠. 정권이 바뀐 후에도 시간제 일자리를 유지하는 곳이 얼마나 될까요”라고 반문했다. 재계 관계자의 신랄한 지적이다.

이는 과거 정부 때도 경험한 바 있어 기업들이 ‘정책 코드 맞추기’에 불과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정책 따로…현장 따로…공기업 비정규직 채용 여전
기업들 “정규직 전환으로 신규채용 줄어들 것”


일례로 이명박 정부 때의 취업 키워드는 ‘고졸 취업’이었다.
당시는 ‘고교다양화 300 프로젝트’를 발표하면서 전문적인 산업인력을 양성해 고졸 취업을 활성화한다는 취지로 실업계 고등학교를 특성화고로 재편했다. 이어 정부는 일과 학습을 병행하며 성공한 직업인으로 성취하고, 전문계고의 선도 모형으로 육성하겠다는 정책에 따라 9개교의 마이스터고를 2008년 10월 선정 및 발표했다.

이명박 정부 말인 2011년에는  특성화고 취업역량 강화사업 특교금이 14억~16억 원 수준에 이르기도 했다. 또  은행권이 고졸 채용을 강조하면서 우수한 학생들이 특성화고로 많이 몰렸다.

그러나 기획재정부가 2014년 국정감사 자료로 낸 ‘공공기관 고졸 채용’ 현황을 보면 2009~2014년 산업금융지주와 중소기업은행은 공공기관임에도 6년간 고졸 채용이 고작 0명과 12명(정규직 기준)에 불과했다. 한편 신한, 우리, 하나, 농협(2012년 출범)은행 등은 이 기간 현황 집계를 하지 않았거나 인원을 공개하지 않았다.

2013년 고졸 채용 규모를 크게 줄였던 은행권이 올해는 대부분 ‘아직 계획 없음’이라며 서로 눈치를 보고 있다. 정부와 여론의 감시만 없다면 채용을 아예 접겠다는 것이 은행 내부 분위기다. 시중 은행 관계자는 “은행에서 채용할 수 있는 인원은 한정돼 있는데 경력 단절 여성을 뽑으려면 고졸 채용을 종전처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겠느냐”며 “은행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명했다.

마찬가지로 박근혜 정부 때는 ‘경단녀 취업’이 화두였다. 경단녀는 경력 단절 여성을 줄인 말이다. 당시 정부는 출산과 육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된 여성을 타깃으로, 노동시장 유인을 통해 고용률 70% 달성을 목표로 내걸었다.
그 결과 당시 금융업계의 경단녀 취업이 줄을 이었다.

은행권에 따르면 신한은행을 비롯한 우리은행과 국민은행 등 경단녀 채용에 앞장섰다. 신한은행은 정규직의 고용형태로 경력녀를 2014년 220명 뽑는 데 이어 2015년 280명을 채용 계획을 밝혔었다.

우리은행과 국민은행도 경단녀를 선발하는 데 정규직이 아닌 파트타이머 형태로 채용했다. 우리은행은 경력단절여성 330명을 파트타이머(시간제 종사원)로 채용했다.
국민은행도 경단녀를 중심으로 150명의 파트타이머를 채용했다. 국민은행은 8시간 근무하는 일급제와 5시간을 근무하는 시간급제로 나눠 채용을 진행하고 취업 후 성과에 따라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현 정부에서 조사한 결과 5대 은행 경단녀는 2015년 1123명을 기록했지만, 2016년 851명, 2017년 596명으로 쪼그라들었다. 2015년 대비 증감률은 2016년 -24.2%, 2017년 -46.9%이다.

이에 따라 현 정부의 정규직 전환 정책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대내외 불안과 경기침체 등으로 경영 환경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무턱대고 정규직을 늘리는 것은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채용을 외면하기에는 정부 눈 밖에 날까 봐 신경 쓰이는 게 현실이다.

10대그룹 한 관계자는 “기업들이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위한 로드맵을 마련 중이지만 일선 공공기관에선 비정규직 채용을 기존 관행대로 진행 중이다”며 “공공 부문 노사 관계를 악화시킨 주범인 성과연봉제는 ‘폐지’ 방침을 정했지만, ‘노사 자율’이라는 이름하에 후속 조치는 공전(空轉) 중이다. 정부 정책에 따라 운영 방침과 예산 등이 바뀌는 공공기관 특성상 개별 정책에 대한 정부 방침이 명확해지기 전까지 이 같은 혼선은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계획을 발표한 대기업 관계자도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기존 고졸·경단녀 채용에 비해 인건비 상승 부담이 훨씬 커 상당한 후유증이 남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경우 신규채용이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그나마 대기업들의 사정은 나은 편이다. 중소기업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중소기업 관계자는 “정부 정책에 발 맞추고 싶지만 그렇지 않아도 경영 상황이 좋지 않은 중소기업들이 몇 곳이나 동참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경제단체들은 침체된 경기 에 기업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고 있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기업들이 정부 정책에 동참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정부도 기업의 애로사항 해소에 힘써 달라는 주장이다.

경제단체 관계자는 “기업에 대한 규제가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일자리를 창출하려고 하니 기업들은 죽을 맛”이라며 “찍어 누르기식 정책이 정권이 바뀐 후에도 유지될 지 의구심이 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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