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 중 ‘20%’ 의대 보낸 곳도

사진은 본 기사와 무관함 <뉴시스>
[일요서울 | 조택영 기자] 초등학교 때부터 선행학습은 물론 각종 대회를 준비하며 일종의 마라톤을 펼쳐야 문을 두드릴 수 있는 학교가 있다. 바로 영재고‧과학고다. 그러나 이공계 인력 양성이 목적인 설립 취지와 다르게 지난해 졸업생 중 9%가 의학 계열로 진학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학교는 의학계열 진학률이 20%의 높은 수치를 보인다. 일각에서는 이들 학교가 입시 명문 고등학교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내놓는다. 이 때문에 일부 영재고‧과학고에서는 입학 요강에서 ‘의대 진학 시 불이익이 있다’며 경고 문구를 명기했다. 그러나 아직도 학생들의 의대 진학을 막지 못하는 학교가 대다수다. 일요서울은 영재고‧과학고 학생들이 의대에 진학하는 배경에 대해 살펴봤다.

일부 학교, 입학 요강에 “의대 진학 시 불이익 있다” 명기
“곳곳에서 엘리트로 활동할 기회 막는 처사일 수 있어”


수학‧과학에 우수한 재능과 잠재력을 지닌 인재들을 모아 이공계에 진출하도록 이끄는 영재고와 과학고의 졸업생 열 명 가운데 한 명이 의대에 진학한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 16일 교육부에 따르면 2016년 전국 영재고 졸업생 499명 중 45명(9%)가 의학계열로 진학했다. 2017년 졸업생 675명의 경우 57명(8.4%)이 의대에 진학했다. 과학고는 2016년 졸업생 885명 중 29명(3.3%), 다음해 1676명 중 45명(2.7%)가 의대에 진학했다. 교육계 일각에서는 영재고‧과학고에서 해마다 미래의 의사들을 키워내는 것은 설립 취지에 맞지 않다며 이공계 인재 양성에 쓰겠다는 국고가 엉뚱한 곳에 쓰이고 있다고 비판한다.

현재 영재고는 서울과학고, 경기과학고, 한국과학영재학교, 대구과학고, 대전과학고, 광주과학고 등 6개교다. 과학고는 세종과학고, 한성과학고, 부산과학고, 울산과학고 등 20개교가 있다. 영재고‧과학고는 통상 일반고의 2~4배에 달하는 국가 예산이 지원된다.

교육부가 밝힌 ‘2016~2017년 영재고‧과학고 졸업자 의대 진학 현황’을 보면 지난해 서울과학고는 졸업생 129명 중 24명이 의학계열에 진학했다. 경기과학고는 127명 중 16명, 세종과학고는 54명 중 5명, 한성과학고는 69명 중 9명 등으로 집계됐다.

특히 영재고에서 의대에 가장 많은 졸업생을 보낸 곳은 2009년 과학고에서 영재고로 전환한 서울과학고로 2017년 졸업생 125명 중 25명, 즉 20%가 의대에 갔다. 이 학교는 지난 2013년부터 해마다 약 15~23%의 졸업생이 의학계열로 진학하고 있다. 경기과학고도 마찬가지다. 2017년 졸업생 127명 중 10명, 7.8%가 의학계열로 진학했다.

과학고도 지난 2013년에서 2017년 사이 졸업생의 평균 약 3% 정도가 의대에 진학했다. 지난 2015년에는 진학률이 1.7%로 잠시 떨어졌으나 2016년과 2017년에 다시 3.3%, 2.7%로 두 배 가까이 상승했다. 이중 서울 지역 과학고의 의대 진학률이 지방보다 높은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서울에 위치한 세종과학고 10.7%, 한성과학고 8.1%가 의대로 진학했다. 이는 같은 해 전국 20개 과학고 졸업생의 평균 의대 진학률(2.7%)보다 약 4배 높은 수준이다.

한 영재고 관계자는 “의사들이 수입이 많고 안정적이며 사회적으로 우대받는 것(사회적인 현상) 때문”이라며 “대개 의학계열로 가는 학생들은 부모의 생각(의대 진학)이 강해서다”고 말했다.

지난해 1월 사교육걱정없는세상(사교육걱정)은 더불어민주당 유은혜 의원과 함께 국회 의원회관에서 ‘과학고 및 영재학교의 대학 진학 실태와 대안 마련’ 토론회를 열고 영재고‧과학고에 진학한 학생들이 의학계열로 진학하는 것에 대한 대안을 모색했다.

이날 발제를 맞은 김정연 사교육걱정 정책대안연구소 연구위원은 “과학고가 입시경쟁에 노출되기 시작하면서 학부모와 학생들의 요구를 수용하며 과학고의 설립 취지에 부합한 과학 영재 교육보다는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도록 교육과정 운영에 초점을 맞추게 됐다”며 “이로 인해 과학고의 교육과정이 파행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으며 학교의 설립 목적과는 달리 단순히 명문대학 진학률이 높은 입시 명문 고등학교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현재 있는 영재학교 8개 중 6개가 모두 과학고에서 영재학교로 전환된 것이고 나머지 두 개의 영재학교(세종과학예술영재학교, 인천과학예술영재학교)도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과학, 기술, 공학 분야를 주축으로 예술 및 인문 분야의 융합 영재를 키우기 위한 학교들”이라면서 “설립 취지와 목적에 부합하는 학교 운영이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고 전했다.

영재고들은 문제의식을 느껴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입학 전형요강에 의학계열 희망 학생들에 대한 경고 문구 등을 삽입했다.

교육부도 전국 8개 국공립 영재고와 20개 국공립 과학고의 학칙이나 입학요강에 ‘의대 진학 시 불이익을 받는다’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입학설명회 등을 통해 알릴 것을 권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중 의학계열 진학률이 가장 높은 서울과학고는 2018학년도 입학 전형 요강에 “본교는 과학기술 인재 양성을 위해 설립된 과학영재학교로 의‧치‧한의학계열 대학으로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은 본교 지원이 적합하지 않으며, 해당 계열 대학에 지원할 경우 불이익이 있음”이라고 명기했다.

서울과학고 관계자는 해당 명기로 인해 “(의대 진학에서 이공계로 생각을 바꾸는 학생들이) 꽤 된다. 고3 학생들의 경우 부모의 의사를 조사해 보면 대략 60명 정도, 즉 50%정도가 의대를 희망한다. (불이익 명기를 하지 않으면) 반 정도 의대를 간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현재까지 서울과학고를 비롯해 경기과학고, 한국과학고, 공주과학고, 대전과학고, 세종예술영재학교 등 일부 영재고‧과학고들이 해당 내용을 밝히고 있다. 학생들에게 추천서를 안 써 주거나 지원금을 회수하는 등 내부 조치는 학교별로 차이가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그 밖의 영재고‧과학고에서는 이조차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서울과학고 관계자는 의학계열로 진학하려는 학생들에게 하는 조치로 “대회(한국수학올림피아드‧KMO 등)에 나갈 때 추천을 안 해 주고 추후 포상에서도 제외한다. 또 장학금 추천을 해 주지 않거나 장학금을 받았어도 반납하는 절차를 거친다”면서 “추천서가 필요한 의대의 경우 선생님들이 추천서를 써 주지 않는다. (이 밖에)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외부에서 추천을 받거나 이공계와 의대를 겹쳐 쓸 때 추천서를 써 주는데 (그때) 의대를 가려 한다는 점을 (추천서에) 반영하겠다면서 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한다. 이것들은 행정적으로 일어나는 것(조치)”이라고 말했다.

이어 “의대를 가는 게 우리학교에서는 정당하지 못한 상황이다. 부모의 생각(의대 진학)이 (학생들의 미래를 위해) 좋은 판단이라고만은 볼 수 없지 않느냐”라며 “(따라서) 진로탐색 강의라고 해서 과학자나 의사 등을 초청해 실제로 무슨 일을 하는지 (교육해) 학생들이 정확하게 판단을 할 수 있는 정보를 주려고 노력한다”고 전했다.

다만 “의대에 가지 말라고 지도를 하지만 이공계를 기반으로 세계 경제학에서 필요할 수도 있고 의학에서 연구자로서의 의사도 있듯이 사회 곳곳에서 엘리트로서 기여했으면 하는 부분이 있다”며 “하지만 현재 의대도 안 되고 법조계도 안 되고 이런 것(현실)들이 사실 조금은 모순된다는 생각을 한다. 협조는 하고 있지만 영재학교는 학생들에게 맞는 교육 과정을 제공해주고 꿈을 심어주고 삶을 이끌어 줘야 하는데 외부에서 의대 진학에 대한 (압박이나) 영향을 주면 (영재학교의) 존립 근거가 흔들릴 수 있다고 본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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