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유홍준, 日반출 과정 문서 공개
육군소장 이케다-육군대신 데라우치 간여

 
북관대첩비 곁을 떠나지 못하는 한 일본인이 있었다. 지난 2006년 2월 20일 경복궁 경내에 보관된 북관대첩비 옆에는 일본인 오다 아키에(小田章惠·여)씨가 사흘째 아쉬운 눈빛으로 비석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당시 오다씨는 북관대첩비가 야스쿠니 신사에 눕혀진 채 방치돼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세울 것을 요구했던 ‘나고야 조선연구회’ 대표 누키 마사유키씨의 제자이자 한일역사연구회 회원으로 대첩비가 곧 북한으로 이송된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한국에 왔다.
 
2월 18일부터 사흘째 아침부터 해가 떨어질 때까지 비석 곁을 지키며 볼 날이 며칠 남지 않은 대첩비를 바라보는 일로 시간을 보낸 오다씨는 경복궁을 찾은 일본인 관광객을 비석 앞으로 불러 비석의 슬픈 역사에 대해 설명해 주기도 했다.
 
누키 선생으로부터 임진왜란에 대해 배운 이후 줄곧 북관대첩비에 애착을 가져왔다는 그는 “대첩비를 보고 있노라면 침략의 역사가 떠오른다.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대신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오다씨는 일본이 한국에 사과하지 않는 이유가 올바른 역사 교육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고이즈미 총리조차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을 받지 못해 무지할 수 밖에 없다. 그도 북관대첩비 앞에 서서 설명을 들었으면 좋겠다”고 꼬집었다.
 
북관대첩비가 북한으로 옮겨진 뒤에도 가족ㆍ지인과 함께 대첩비를 찾고 싶다는 그는 “그때도 고이즈미 총리를 데려가고 싶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한국의 젊은이를 아들 딸로 생각한다는 오다씨는 대첩비 앞에서 눈시울을 붉히다가도 “앞으로 한일 간 민간 교류에 노력하고 싶다”는 의지를 비칠 땐 밝은 미소를 잊지 않았다.
 
일제가 약탈해간 북관대첩비는 100년 만인 지난 2005년 10월 20일 오후 4시 30분 인천공항을 통해 고국 품으로 돌아왔다. 북관대첩비를 실은 대한항공 KE704편은 이날 오후 1시 30분께 일본 나리타공항을 출발해 오후 4시 2분에 착륙했으며, 9분 만인 4시 13분 9번 게이트에 도착했다. 북관대첩비가 100년 만에 고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오후 4시 30분.
 
국방부 의장대의 호위 속에서 비닐로 씌운 흰색 TLB컨테이너(1.5×3.5m)에 담겨진 북관대첩비는 하기(下機)장비인 ‘로더’에 의해 계류장에 내려졌다. 대첩비는 그러나 수송 안전을 위해 길이 280㎝의 나무 궤짝에 담겨져 아쉽게 그 위용을 드러내지 못했다.
 
대첩비는 계류장에 내려지자마자 곧바로 ‘100년 만의 귀환 북관대첩비’라는 글귀와 대첩비 사진이 새겨진 흰색 천에 씌워진 채 지게차로 단상에 옮겨졌다. 이날 북관대첩비 봉영(奉迎)식은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과 김원웅 국회의원, 무소속 신국환 의원, 대첩비를 처음 발견한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 초산 한일불교복지회장 등 40여 명이 엄숙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오후 4시 50분께 단상에 옮겨진 북관대첩비는 참가자들의 ‘환국 묵념’이 끝나자 특수차량에 의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이날 북관대첩비 환국을 취재하려는 취재 및 카메라 기자 60여 명이 취재 신청을 하는 등 뜨거운 취재 열기를 보여줬다.
 
유홍준 청장은 대첩비 귀환과 관련, “북관대첩비 반환은 한일 과거사에서 아픈 상처를 치유한다는 의미가 있다”며 “특히 민관과 남북이 협력했다는 데 단순한 문화재 반환만은 아니다”고 밝혔다. 특히 대첩비를 처음 발견한 최서면 씨는 휠체어에 탄 채 북관대첩비가 계류장에 내려지자 눈시울을 붉히며 “너무나 감격스럽다”고 밝혔다.
 
이날 유 청장은 이 비가 1905년 일본에 반출된 과정을 담은 일본군 공문서를 공개했다. 이 문서에는 비가 일본군에 넘어가 야스쿠니 신사에 보관되기까지의 정황이 담겨 있다. 러일전쟁(1904~1905) 당시 2사단 17여단장이던 일본군 육군소장 이케다 마사스케(池田正介)가 1905년 3월 31일 일본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에게 보낸 편지와 그에 대한 답신이다.
 
데라우치는 나중에 초대 조선총독이 되었다. 이케다는 공문에서 임진왜란 때 정문부가 이끄는 의병이 왜군을 격파한 일을 기념해 세운 북관대첩비의 존재로 인해 북진하던 일본군 병참선이 한국인들에게 방해받을 우려가 있고, 나아가 나중에는 역사상 참고자료로 쓰일 수 있다고 판단해 일본 육군성으로 비를 가져가야 한다고 건의하고 있다.
 
비를 건립한 이들의 후손들에게 비를 일본으로 가져가도 된다는 허락을 증서로 받았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이케다는 또한 북관대첩비를 일본 궁내성의 진천부(振天府. 당시 히로시마 소재) 또는 유취관(遊就館. 야스쿠니신사 내 군사박물관)에 봉납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이에 대해 데라우치 육군대신은 참사관을 시켜 “이 비는 전리품이 아니므로 유취관에 참고품 등을 진열하는 장소에 두는 것이 좋으며, ‘전리품’이라는 말은 삼가고, 대신 ‘러일전쟁 중 육군소장 이케다 마사스케가 북진 시 함경북도 임명역(길주 소재)에서 발견, 지방관리를 통해 건립자의 자손에게 승낙을 받아 가져왔다’는 내용을 기술해 놓으라”고 답신했다.
 
이에 대해 유홍준 청장은 “북관대첩비 강탈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후손에게 승낙까지 받았다는 공문을 본국에 보냈다”면서 “당시 이케다의 치밀함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야스쿠니신사의 북관대첩비를 소개한 최서면 국제한국학연구원장은 이날 고유제에 참석한 자리에서 1905년 10월 29일자 히로시마 신문에서 “어제(1905.10.28) 북관대첩비가 히로시마에 도착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 내용대로라면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개관과 함께 일반에 공개되는 북관대첩비는 정확히 100년 만에 고국의 품에 안는 셈이다. 야스쿠니신사에 보관돼 있던 북관대첩비는 메이지 40년(1907), 당시 도쿄에서 유학 중이던 조소앙(趙素昻)이 마침 이곳에 들렀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조소앙은 재일본 조선유학생 잡지로서 그해 5월에 발간된 ‘대한흥학보’(大韓興學報) 제5호에 ‘소해생’이란 필명으로 기고한 ‘함경도 임진의병 대첩문’이라는 글에서 이 비를 언급했다. 조소앙은 이 글에서 ‘용사(龍蛇)의 난’(임진·정유왜란) 당시에 의병장 이붕수와 정문부 공이 길주에서 적병을 대파한 내용을 기록한 비가 야스쿠니신사에 있다고 하면서, 이 비를 가져온 일본을 꾸짖었다.
 
하지만 이후 북관대첩비는 까마득히 잊힌 존재가 되었다가, 1970년대 최서면 원장에 의해 다시금 주목받기에 이르렀다. 조소앙의 기고문을 발견한 최 원장은 현지 답사를 통해 북관대첩비 실물을 확인하고는 그와 관련되는 글을 1978년 3월 발간된 잡지 ‘韓’(한) 통권 74호(도쿄한국문화연구원 발간)에 실었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반환운동이 본격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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