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옥”… 희생된 이들 위한 위령비라도 세워야

“우와, 대단하다” 지난 2015년 6월 5일 오후 일본 하시마(端島·일명 ‘군함도’)에 상륙한 관광객들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연방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 노동이 이뤄진 현장이었지만 이날 상륙 투어에서 이를 알 수 있는 단서는 없었다.

그동안 군함도는 일본의 에너지 산업을 떠받친 해저 탄광이 있던 곳이거나 광산 노동자들이 목숨을 걸고 전후 공업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현장 정도로 소개됐다. 이날 둘러본 곳에는 출입 제한 구역 안내판 외에 섬의 역사나 시설에 관한 별다른 설명문이 없었다.

결국, 방문객은 유람선 업체 측이 나눠준 안내문·직원의 설명·배 안에서 상영하는 홍보 영상 등을 통해 군함도에 관해 알게 되는데 여기서 조선인 징용에 관한 내용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설명은 전후 시기에 관해 집중됐다.

그래서인지 군함도 징용 체험자가 언급한 매질과 배고픔은 애초에 등장하지 않았고 1974년 폐광 전까지 광산업 덕에 생활수준이 높은 지역이었다는 식의 정보가 많았다. 업체 측이 나눠준 팸플릿은 섬 생활에 관해 ‘학교나 병원, 상점 외에도 영화관이나 파친코장 등 오락시설도 갖춰져 있었다’고 설명했다.

현장에서 안내를 담당한 젊은 직원은 군함도의 광부들이 힘든 일을 하기 때문에 통상 근로자보다 높은 급여를 받았고 폐광 전 유인도였을 당시에는 이 섬의 TV 보급률이 100%에 달했다는 예를 들기도 했다. 이 직원은 일본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 군함도의 자연재해, 좁은 섬에서 이뤄진 특수한 생활 방식 등 미리 외운 듯한 내용을 쉴 새 없이 쏟아냈고 설명이 그치면 방문자들은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폐허가 된 섬에 서린 조선인 징용 노동자의 한(恨)을 웃고 즐기는 관광객 사이에 풀어놓기는 쉽지 않은 분위기였다. 현장에서 이뤄지는 전후 중심의 설명은 일본 정부가 1850∼1910년으로 시기를 한정해 군함도를 세계유산으로 추천한 것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점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었다. 1시간가량 이어진 섬 상륙은 업체가 미리 준비한 대형 날짜 간판 앞에서 희망자들이 단체로 인증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나가사키(長崎) 항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도호쿠(東北) 지방에서 온 일본 여대생에게 ‘혹시 조선인이 일제 강점기 때 군함도에서 강제 노동을 했고 이 가운데는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다는 사실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이날 상륙 중에 설명했던 직원에게 조선인 강제 노동에 관해 언급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자신은 안내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에둘러 답했다. 그는 이를 소개하는 것이 좋은지 작가에게 의견을 구했다.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리면 좋겠다’는 취지로 조언했더니 덕분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됐다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중년의 다른 직원은 팸플릿은 시(市)에서 제작한 것이라서 어쩔 수 없지만, 자신이 안내를 담당할 때는 조선인 징용에 관해 설명한다고 말했다.

하시마 탄광 등 조선인 징용 현장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는 일본 정부 구상에 비판적인 이들을 군함도가 있는 나가사키(長崎)시에서 꽤 만날 수 있었다. 지난 2015년 6월 5일부터 8일까지 취재 중 만난 이들은 역사적 사실만큼은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군함도에 가는 배를 탔으나 파도가 높아 상륙하지 못하고 돌아온 한 남성은 징용 사실을 제외하고 세계유산에 등재하려는 구상을 한국이 비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세이 순지라고 이름을 밝힌 이 남성은 일본이 식민지 지배로 이익을 얻고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것을 언급하며 강제 노역의 “역사를 확실하게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가사키 항구 근처에서 찻집을 운영하는 60대 남성은 군함도가 외지인들에게 관광지로만 인식되는 것이 안타깝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그는 “지금은 군함도라고 하지만 과거에는 ‘감옥섬’이라고 불릴 만큼 한번 들어가면 살아 나오기 힘든 곳으로 평가받았다”며 “희생된 이들을 위한 위령비라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군함도를 오가는 여객선 운영업체에 근무하는 중년의 직원은 방문객이 정작 관심을 두는 사항을 고려할 때 일본 정부가 세계유산을 신청하면서 1850∼1910년으로 기간을 한정한 것이 “어떻게 생각해도 이상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군함도에 있는 일본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인 ‘30호 아파트’는 1916년에 지어지는 등 군함도 안내 팸플릿에 소개된 71개의 건축물 가운데 1910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지적이 상당히 일리가 있다.

다카자네 야스노리(高實康稔) 일본 나가사키(長崎)대 명예교수는 기간을 한정한 것이 ‘일본의 근대화가 부국강병 정책과 이후 침략, 식민지배가 표리일체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감추는 전술’이라고 일침을 놓았는데 전문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 셈이다.

하지만, 이런 의견들이 현지 행정기관의 자료나 각종 전시시설에 반영되기에는 아직 힘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일단 나가사키시는 강제 동원의 역사를 알리는 데 반대하거나 적어도 소극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나가사키시 공식 관광안내 사이트는 하시마탄광이 ‘일본의 근대화를 떠받쳤다’고 설명하는 등 긍정적인 측면만 부각하고 있을 뿐 조선인 노동자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나가사키에 있는 군함도 자료관에서도 강제 동원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곳 자료는 대체로 군함도가 일본의 산업 발전에 기여한 측면, 전후 군함도의 모습, 생활상, 변화 과정 등에 주목하는 내용으로 돼 있다. 전시물에는 한국어 설명도 병기돼 있지만 정작 한반도에서 끌려온 노동자의 존재는 기록돼 있지 않았다. 자신에게 불편한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려는 심리나 역사 수정주의 등을 주장하는 우익 세력이 이런 절름발이 역사 인식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유산등록에 사활을 건 관광업계 등이 입맛에 맞는 역사만 골라 알리려는 일본 정부의 전략에 침묵하거나 동조하는 듯한 분위기도 느껴진다. 이는 굳이 불편한 역사를 끄집어 내기보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하는 것이 세계유산 등록이나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데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나가사키 조선소의 사료관이 자화자찬으로 가득한 것에서 보듯 미쓰비시(三菱) 중공업처럼 징용 노동자의 희생을 과거에 발전 동력으로 삼은 당사자가 부끄러운 역사를 스스로 드러낼 것을 기대하기는 요원하다. 장기적으로는 균형잡힌 역사의식을 지닌 일본 시민을 얼마나 늘어날지, 또 이들이 제 목소리를 낼지가 과거사 논쟁에서 중요한 문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윤광제 작가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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