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여정부  경험 있으면 문제없다는 문제적 시각
- 온정주의가 문재인 정부의 약점이 될 수 있어
<뉴시스>
 참여정부는 무오류했는가?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면 누구라도 ‘그렇다’고 선뜻 대답하지는 못할 것이다. 세상에 무오류한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대신 요즘 세태에선 이런 질문을 던지면 ‘무슨 의도로 그런 걸 물어요?’라면서 화를 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박기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혁신본부 본부장 후보의 인선 문제를 보면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정권 핵심이 무슨 일을 했든지간에 참여정부와 함께 일을 한 이들, 그들이 가장 어려웠고 ‘폐족’ 취급받았을 때 잘해준 이들에 대해선 무한한 온정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 말이다.

인지상정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인지상정이 인선 문제에까지 발현된다면 이미 정치적인 문제다. 문재인 대통령부터가 수위 조절과는 거리가 멀다. 대선 전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참여정부의 공과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문재인 대통령은 “공은 8, 과는 2 정도라고 봅니다”라고 답변했다.

냉소적인 사람이라면 ‘그쯤 얘기했으면 본심으로는 잘못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네’라고 독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까지는 아닐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성품으로 볼 때 정말로 진솔하게 본인이 느끼는 그대로 얘기한 것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감탄만 할 일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자세를 낮추고 대중을 위해서 본심을 약간 뒤로 물릴 수 있는 정치인이 자질은 더 뛰어난 것일 수가 있다.

문재인 정부 외면하는 ‘참여정부의 실패’

참여정부는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정부다. 석패한 것도 아니다. 압도적인 패배였다. 민심의 이반이요, 심판이었다. 많은 노무현 지지자들은 이 패배를 자신들의 패배가 아닌 정동영의 패배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참여정부 노선을 확고히 견지하는 누군가 나갔으면 훨씬 나았을 거란 것이다.

물론 정동영이란 정치인의 한계도 있기 때문에, 당시 경선에서 경합했던 이해찬이라든가 다른 후보가 나갔을 경우 당시 이명박 후보와의 격차가 상대적으로 덜했으리라는 상상을 해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당연히 그 반대 경우, 그러니까 격차가 더 벌어졌을 경우도 상상할 수 있다. 이해찬 역시 대중적으로 소구되는 정치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왜 당시 정동영 후보는 질문을 받을 때보다 참여정부의 과를 반성한다고 말해야 했을까? 세상에 어떤 여당 후보가 그렇게 반응하겠는가? 인기가 너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대선을 앞두고 여당이 이합집산을 반복했다. 당을 쪼개고 합치고 별짓을 다하면서 열린우리당의 색깔을 지우려 했다. 책임 있는 정치행동이 아니었다고 비판한다면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 열린우리당이 인기가 있다면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임기 4년 차였던 2006년 4분기 당시 노 대통령의 지지율은 여론조사에서 12% 정도였다. 여기서 저점을 찍은 후 회복되어 임기 말 27%까지 상승하기는 하지만 최순실 게이트 같은 극적인 상황이 없는 한 대선과 같은 양대 진영의 대립구도를 앞두고 만들어진 관례적인 상승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선거 결과로만 보면 더 나빴다. 참여정부는 임기 내 벌어진 재보궐선거에서 단 한 석도 획득한 적이 없다. 물론 재보궐선거는 투표율이 높지 않기 때문에 노년층의 결집이 손쉬운 보수 정당에 더 유리하다. 그렇다고 해도 전임 정권인 국민의정부에 비해서도 훨씬 참혹한 성적이었다.

하긴 정부의 잘못만으로 생긴 현상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민주당 분당을 통한 열린우리당 창당을 통해 자당 지지층이 분열되고 기층 조직이 해체되는 수순이었던 탓이 더 크다. 그런데 이는 ‘기득권 세력의 반발’로 생긴 일도 아니고 그들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세력의 지지자들 중에선 열린우리당 창당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는 이들조차 드물다. 문제제기를 하면 지지자가 아니라는 식이다.

‘참여정부의 수치’를 반복해선 안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대한민국의 불행한 역사다. 누군가는 국민들에 비해 너무 앞선 정치 리더였다고 칭송하기도 한다. 일정 부분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사업가가 너무 이른 아이템으로 수익을 내지 못했을 때 우리는 그 사업가가 미래를 예견한 사람이라 칭송하지 않는다. 미래학자와 사업가의 역할이 다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는 진리탐구의 영역이 아니다. 설득하고 합의하고 결정하고 실행하여 결과를 내야 하는 자리다. 참여정부는 이 지점에서 우왕좌왕한 정부다. 이것을 ‘공팔과이’라고 평한다면, ‘과유불급’이라고 돌려줄 수밖에 없다. 정말로 그런 인식만으로 정권을 운영한다면 ‘참여정부 시즌2’의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황우석 사태는 대한민국의 수치였다. 국익을 중시하는 민심이 모두 그에 놀아났고, 그를 결사 옹호한 이들(특히 언론인들) 중엔 보수주의자도 많았다. 그 거대한 바위에 계란 부딪히는 심정으로 젊은 과학자들과 프레시안 같은 군소 언론과 MBC PD수첩이 대항하여 사기극을 밝혀냈다. 제도가 기능적으로 거르지 못한 것을 보다 못한 사람들이 자발적인 팀워크를 이루어 만들어낸 소박하지만 위대한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참여정부의 수치이기도 했다. 그리고 박기영 후보는 그 핵심에 서 있었다. 그가 정권 핵심세력이 가장 어려웠고 핍박받은 시절에 많은 도움을 준 이라면 그 사실에 감사하는 것은 인지상정의 영역이다. 그렇다고 인사가 보은으로 집행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군말 덧붙일 이유도 없는 상식의 영역일 것이다. 
<한윤형 데이터앤리서치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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