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이창환 기자] 영화를 평할 때 종종 ‘관객을 체험하게 한다’는 표현을 쓴다. 보고 듣는 것 이상의 몰입을 안기는 것에 대한 칭찬인데, 현장에 직접 앉아 체험하지 않으면 감상이 성립되지 않은 연극에서 ‘체험하게 함’은 단순히 몰입적 쾌감에 국한되지 않는다.

연극의 몰입은 배우로부터 불거진다. 배우가 어떤 역할을 실감 나게 연기하며 공감하지 못하거나 불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역할을 위로하고 변호하고 배우의 희생을 통해 솔직히 드러낼 때 관객은 마음을 열거나 동경한다. 연극 <비너스 인 퍼>처럼 욕망과 치부를 건드리는 작품일수록 배우는 관객을 끌어당겨야 한다. 그럴 때만이 영화적 스펙터클과는 다른 은밀하고 관념적인 스펙터클이 만들어지며 배우의 목소리만으로도 의식을 확장할 수 있다.

모든 감동과 예술성은 읽는(보는) 사람에 달렸지 쓰는 사람에 달려있지 않다는 개인적 전제를 빌려, 연극이 영화보다 깊은 몰입을 선사한다는 단정은 아니다. 

다만 한 배우가 수십 번 되풀이한 연기 중에서 가장 적합한 것을 담는 영화와 달리 눈이 찌릿하게 빛나다가 홀연 무엇에 취한 것처럼 눈이 깊어질 때조차도 대사를 더듬기도 하는 연극에서, 관객은 그 인간적 한계와 천재성의 공존 덕에 몰입한다. 이는 한 명의 배우와 하나의 역할이 일치하는 연극적 순간이다. 

배우들의 긴 완벽함 옆에 도사리는 현실적 불완전은 무덤덤하고 회의적인 관객을 두드리기에 알맞고 파격적인 내용을 전달하기에도 알맞다. 연극 <비너스 인 퍼>는 이도엽, 방진의, 지현준, 이경미의 연기뿐 아니라 무대와 연출 등에서 연극이 지향해야 할 부분을 빠짐없이 보인다.

 

<비너스 인 퍼>는 무대를 가운데에 두고 객석이 마주보고 있다. 무대는 관객이 앉는 정면으로는 짧고 좌우로 상당히 길다. 무대와 객석의 거리는 매우 가깝고 반대편 객석 또한 그에 못지않게 가깝다. 관객은 원한다면 반대쪽에 앉은 관객의 시선과 표정을 지켜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반응을 자신의 극 감상에 영향을 미치도록 만들 수도 있다. 무대와 객석의 입체적인 배치와 가까운 거리는 몰입을 돕는다. <비너스 인 퍼>가 공연되는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의 특징으로, 지난 몇 년간 ‘두산인문극장’ 연극 시리즈에서 여러 번 여러 방식으로 목격한 바 있다. 대사 이외에 적지 않은 것들을 작품 일부로 품는 연극의 경우 무대를 어떻게 구성했느냐에 따라 작품과 연계시킬 수 있는 해석은 늘어난다. 그리고 <비너스 인 퍼>는 이 점을 중요하게 여긴다.

지배와 피지배, 주인과 노예, 자유와 속박 등 역사적이고도 보편적인 요소를 가학성과 피학성에 결합한 <비너스 인 퍼>는 복잡하고 모호한 세부 전개를 택한다. 연극은 대사의 예술이고 <비너스 인 퍼> 대사는 훌륭하나, 그 때문인지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렵다. 한동안 곱씹어 생각해야 하는데 관객에게 이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모호하고 모순적인 대화와 숨겨진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와중에도 몰입은 이어져야 하는데 <비너스 인 퍼>는 이미 말했듯 연기와 무대 구성으로 이를 해낸다. 

특히 몰입만이 남고 대사와 메시지는 뒤로 물러서는 순간이 오면 개개인의 감상은 커진다. 작품 속 의도하지 않은 사소한 부분이 머릿속에서 펼쳐지고 확장될 수 있으며, 혹은 작품과 관객 자신 간의 비 소통성을 연민으로 변형시킬 수도 있다. 도발적이고 섹시한 여주인공 벤다는 관객의 이런 우연적 통찰을 돕는다. 여성의 성적 매력을 수반한 메시지는 졸렬하고 수동적인 의식을 깨우기에 언제나 효과적인 것 같다. <비너스 인 퍼>는 S&M의 일반적 인식을 벗어나, 예를 들자면 지배받고자 하는 것이 사실 얼마나 위선적이며 독단적인 본성인지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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