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이후 식량난·경제난으로 사회질서 붕괴, 노동당 역할 못해
체제 존속의 길 찾아 위험천만한 핵 도박 계속 이어가


治일제의 무조건 항복 후 한반도 북쪽에 진주한 소련군의 지원 하에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한 북한 정권은 한국전 도발로 이후 한반도에서 민족역량을 분산시키는 남북대결이라는 소모전의 불행한 역사를 만들어냈다. 북한 정권은 자신들의 체제 생존이 문제 된 지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체제 존속의 길을 찾아 민족의 운명을 건 위험천만한 핵(核)도박을 이어가고 있다.

조선노동당은 정부보다도 3년 일찍 태어나 북한 정치의 구심점 역할을 해 왔다. 고(故) 김일성 주석의 사망과 1990년 중반 밀어닥친 경제난 속에서 당의 기능이 예전 같지 않다는 분석이 잇따르고 있지만 노동당은 여전히 북한 사회에서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정치조직이다.

‘혁명의 주력군’이라고 불리며 정치·사회적 영향력이 크게 증대되고 있는 인민군도 상층부에 노동당의 집행기구인 군 총정치국이 있고, 중대 단위까지 당조직(정치부)이 설치돼 있다. 북한은 왜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와 달리 ‘공산당’이 아니라 ‘노동당’을 당명으로 삼았을까.

북한이 조선노동당 창건일로 기념하고 있는 1945년 10월 10일은 ‘조선공산당 서북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결성된 날이다. 조선공산당은 1924년 서울에서 조직된 이후 일제의 계속된 탄압으로 박헌영의 ‘서울콤그룹’만 지하조직으로 명맥을 유지하다 해방과 함께 재건됐다. 30년 이상 사회주의 계열의 구심 정당 역할을 맡았던 조선공산당이 조선노동당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1946년이었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그해 4월 ‘북조선공산당’으로 명칭을 변경한 데 이어 8월에는 중국 연안파(延安派)가 중심이 된 조선신민당과 합당, ‘북조선노동당’이 탄생했다. 남측의 조선공산당은 1946년 11월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과 함께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했다. 두 노동당은 1946년 6월 통합돼 조선노동당으로 거듭났다.

북조선공산당은 1946년 8월 28일 신민당과 합당 당시 노동자, 농민은 물론 근로인텔리 등 각계 각층을 아우르는 동시에 이전 사회주의 계열의 당파성, 이합집산의 이미지를 떨쳐 버리려 애썼다.

조선노동당출판사의 ‘김일성전집 4권’(1992)에 따르면 고(故) 김일성 주석은 1946년 8월 29일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 당시 ‘근로대중의 통일적 당의 창건을 위하여’라는 보고에서 “두 당의 합동(합당)은 노동자, 농민, 근로인텔리의 광범위한 대중을 튼튼히 결속시키는 데 있어 커다란 전진”이라고 평가했다.

또 “근로대중이 분열되는 것은 최대의 위험”이라며 “근로대중의 통일적인 참모부, 근로인민의 유일한 전투적 선봉대를 꾸리는 문제는 오직 노동당을 창립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김 주석은 같은 날 ‘노동당의 당면과업에 대하여’라는 연설에서도 “노동당은 어디까지나 맑스-레닌주의를 지도이론으로 삼을 것”이라고 못박은 뒤 “우리는 좌·우경적 경향과 무자비하게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주석은 ‘인텔리당’으로 불릴 정도로 지식인과 유산계급이 주축이 된 신민당과 합당을 통해 노동자, 농민뿐 아니라 각계 각층을 포괄, 더욱 확고한 지지 기반을 구축하려 했다.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조선전사 23권’(1981)도 “근로대중을 대표하는 여러 정당들의 통합은 절실한 문제였다”며 “공산당이 좁은 계급적 울타리를 벗어나 다른 근로자당과 합당해 광범위한 근로대중을 묶어 세울 수 있는 대중적 당으로 발전하는 것은 당시 조성된 정세와 당 및 혁명 발전의 합법칙적 요구였다”고 설명했다.

북조선공산당의 ‘끌어안기 전략’은 한반도 북쪽에서 친소련파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소련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졌다. 이는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에서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주석단 귀빈으로 대회를 지켜보던 소련의 이그나치예프 대령은 “김일성 동무를 추대하는 것이 정해진 사실이다”라는 공산당 측 간부의 말에 신민당 대표단이 술렁이는 것을 보고 즉각 의장단에 ‘휴회 쪽지’를 보냈다.

그는 이어 양당 지도부를 불러 “위원장이 반드시 김일성이어야 한다는 철칙은 없다”는 것을 속개 본회의에서 발표하도록 지시해 신민당측의 불만을 가라앉히는 ‘세심함’까지 보였다. 1948년 공산당원(약 27만명)이 신민당원(9만명)보다 절대 우세에 있었음에도 위원장직을 신민당 당수인 김두봉에게 양보한 배경에는 지지 기반 확대와 안정이라는 김 주석과 소련의 의도가 있었던 셈이다.

송하성 경기대 교수는 “북조선공산당 지도부는 보다 폭넓은 사회계층을 지지세력으로 망라하기 위해 신민당과 합당을 적극 추진하고 당명까지 바꿨다”며 “공산당과 노동당의 본질적인 성격은 같다”고 말했다.

‘선군정치(先軍政治)’ 군을 앞세운다는 북한의 정치이념은 환갑을 맞아 흔들리고 있는 조선노동당의 정치적 입지를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고(故) 김일성 주석이 생존해 있던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노동당은 ‘수령의 혁명사상을 실현하기 위한 노동계급의 정치적 조직’으로 ‘혁명의 참모부’로 평가받았다.

노동당을 ‘전체 근로대중 조직체 중에서 최고형태의 혁명조직’으로 규정한 당규약은 노동당이 북한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체임을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1994년 이후 극심한 식량난과 경제난으로 사회질서가 붕괴되는 가운데 노동당은 더 이상 최고권력의 정치체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국방위원회가 북한 내 최고결정기관으로 자리잡으면서 당의 위상은 더욱 약화되고 있다.

국방위원회는 단순히 국방 관련 사안뿐 아니라 외교와 경제정책 등 북한 내 각종 현안 해결의 최고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정책결정 과정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당의 기능이 점차 축소되고 군의 역할이 더욱 커지고 있다. 여기에다 미국과 대립이 고조되면서 전쟁 억제력으로서 군의 역할은 더욱 중시되고 있을 뿐 아니라 경제 분야에서도 국방공업 우선노선이 나오고 있다.

또 경제정책을 추진함에 있어서도 과거 당이 정책결정의 중심에 섰다면 1998년 제10기 1차 최고인민회의 이후에는 내각의 기능이 강조되면서 당의 역할은 축소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노동당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군이 당보다 우위에 있다거나 당의 기능이 무용지물이라는 지적은 성급한 판단으로 보인다. 북한군은 당의 군대로 규정되고 있어 군대가 당보다 우위에 설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군대의 중요성을 지적하면서도 군대는 노동당을 뒷받침하는 세력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 것이다. 경제 발전과 체제보위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북한의 절박한 상황에서 ‘혁명의 주도세력’ 조선노동당이 군, 내각과 관계에서 어떻게 위상을 정립할지 주목된다.

윤광제 작가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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