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 점점 ‘기본기’가 부족한 형태 보여

<정대웅 기자> photo@ilyoseoul.co.kr

문재인 정부의 인사는 완벽한가? 이렇게 물으면 긍정적 답변을 내리기 어려울 것이다. 일단 완벽의 기준이 너무 높기도 하다. 이 정부는 촛불시위를 통해 창출됐다. 기대치가 대단히 높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인사가 황당한 일이었는가? 이렇게 묻는다면 답변이 또한 어렵다. 정부 여당보다 야당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들은 왜 반대표를 던졌는가?

김이수 후보자가 진보적이어서 문제였나? 상대가 공영방송 간부들이었다면 좀 더 타당할    질문이다. 어차피 편협한 사법고시로 선발된 인재들이다. 그들 내부에선 진보니 보수니 할 수 있지만 바깥 시민사회에서 볼 땐 도긴개긴이다. 그에게서 정치적 편향성의 문제를 발견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개신교 일부 분파 주장
설득력 떨어져


‘동성애 합법화’ 논란에서 개신교 신앙을 가진 의원들이 적극적으로 이탈했다는 말도 돈다. 그렇다면 지금 개신교 일부 분파는 사회 담론에 해를 불러 일으키는 노이즈 마케팅을 하는 중이다. ‘동성애 합법화’가 가능한 일일까?

노령연금보다 사람들은 영원히 젊은이로 살고 싶어 한다. 부자 소득의 50%를 갈취해서 빈자에게 뿌린다 한들 국적으로 바꾸겠다는 결심이 가능할 뿐 그 나라에서 빈곤층으로 살겠다는 결심을 할 이가 있는가? 개신교 일부 분파의 논리는 상식이 없다. 동성애자들에 대한 차별을 덜하자는 법안을 가지고 동성애를 조장한다고 한다.

개신교인을 공무원에서 배제하자는 법안을 추진해야 할 판이다. 그 법 통과되고 나서 그 법 폐지 청원할 때 ‘개신교를 조장하는 법 개정을 반대한다’고 논평낼 일이다. 교회가 세금 내면 신자가 불교도가 되는가?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이런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정치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들이 김이수를 동성애 조장론자로 몬 이유는 군형법상 계간죄에 대한 위헌 의견을 냈기 때문이다. 진보담론의 이 조항에 대한 의견이 다소 도식적이고 지나친 부분이 있다. 군대는 계급사회고, 한국군의 특성상 그게 극대화되는 면이 있다. 이를테면 저 조항이 없을 경우 동성애자 상병이 일병에게 섹스를 요구할 때 후임이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느냐는 공포적 맥락이다.

그렇더라도 그 법안은 문제적이다. ‘계간’이란 단어 자체가 특정한 권력적 맥락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동성애를 척결해야 할 사회악으로 비난하고 있다는 비판이 분명히 가능하다. 이 법안이 사라지면 동성애자가 늘어날까? 그렇지 않을 거라고 본다.

본인이 동성애자임을 숨기고 이성과 결혼하는 이들이 줄어들 수는 있다. 이걸 ‘늘어났다’라는 말로 표현해야 할까? 정말이지 <패왕별희>를 보면 동성애자가 되고 싶어지는가? 그래서 <패왕별희>를 상영금지해야 하는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와 선진화가 이 정도 담론을 논박할 수준도 안 되는가?

정부 여당보다 야당 위기
먼저 올 수 있어


대의민주주의는 대중이 그릇된 선동에 휩싸이더라도 현명할 것이라고  판단해 선출된 이들은 다른 판단을 하라는 제도다. 현명하지 않다면 대의  기능이 축소된다. 아테네식 추첨제 민주주의나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결합한 제도를 도입하라는 압력이 높아진다.

지금 개신교의 극히 일부 분파에서 문제삼는 법안들을 ‘동성애 합법화’로 해석하고, 신앙으로 그걸 반대하라는 주장은 지극히 부실하고 선동적인 주장이다. 여기에 국회의원들이 놀아난다면 대의민주주의의 의미가 없다.

그런데 놀아난다. 왜 그럴까? 조직화된 교회는 눈에 보이고, 교회를 싫어하는 사람은 조직화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의 생리상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창의성이 부족한 사람들이다.

마치 정규직 노조만 조직화되었다고 그들의 이익만 옹호하는 일부 진보담론과 흡사하다. 그 바깥에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정치권에서 그들의 표를 계산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 윤리가 아닌 현실정치의 차원에서도 말이다.

김이수 부결 이후에 야당이 희희낙락하는 기색이다. 물론 문재인 정부 인사엔 부족한 부분도 많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언급한 ‘4강 외교부 대사 교체’는 차라리 논의할 지점이 있다. 그런데 왜 그 전초로 김이수를 날렸나? 김이수는 대체 뭘 잘못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 야당이다. 야당이 답변을 뭉개고 갈 경우 이에 대한 질문을 해야 언론이다.

한국 정치는 점점 ‘기본기’가 부족한 형태로 흘러가고 있다. 패스도 드리블도 슛도 못하면서 경기를 이기라는 식이다. 불가능한 일이다. 총선이 멀리 남았다고 야당들이 안심할 일이 아니다.

많은 정치평론가들이 김이수 부결에서 정부 여당의 위기를 말하지만 오히려 야당의 위기를 떠올리는 이유는 그래서다. 야당이 정권 반대에 선동적일 수는 있지만, 이유는 있어야 한다. 정말로 타당한 이유에 기반해서 반대했는가? 유권자들 다수가 납득할 설명을 할 수 있는가?

여기에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한다면 야당들의 정치적 기반은 없다. 그때그때 혐오발언의 맥락에 따라 환호하며 유동하는 지지층만 남을 뿐이다. 보수가 그토록 허약한 지반이었냐고 묻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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