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와 중기의 권력층은 훈구파(勳舊派)였다. 태종 이방원에 왕권을 바친 공신들과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대군을 도운 공신들의 권력집단이 그들이다. 특히 신숙주와 한명회 등을 주축으로 한 공신들은 장기간 권력과 부를 장악했다. 사림파라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에 잠시 위태로운 시기를 맞기도 했으나 나름의 정치철학으로 이를 극복하며 권력을 수호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만했다. 자기네들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마약과도 같은 권력에 중독된 나머지 부패와 도덕성에는 눈을 감아버렸다. 이에 민심은 이반되기 시작했는데 훈구파는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반면 사림파는 네 차례의 사화(士禍)를 겪으면서도 꿋꿋이 살아남았다. 훈구파에 밀려 지방에 내려간 이들은 거기서 실력을 쌓았다. 그리고는 끊임없이 중앙 정치권에 진출을 시도했다. 마침내 200여 년간의 도전 끝에 훈구파를 완전히 밀어내고 권력 쟁취에 성공한 것이다. 
중앙의 훈구파보다는 덜 했지만 사림파 역시 지방의 중소지주로 훈구파와 같은 지방 권력층이었던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훈구파를 밀어낼 수 있었을까에 대한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사림파가 상대적으로 훈구파에 비해 좀 더 객관적이고, 원칙적이고, 좀 더 도덕적이고, 사익보다 공익을 내세우며 성리학을 숭배하는 선비였다. 한마디로 사림파가 좀 깨끗해 보인 까닭에 백성들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다. 조선이 명분을 중시하고 의(義)를 강조하는 나라였다는 점에서 사림파의 명분은 설득력이 있어보였던 것이다. 
훈구파는 ‘시대정신’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데다 사림파와는 달리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도 게을러 결국 사림파에 속절없이 흡수당해 200여 년간 누렸던 권력의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대한민국 현대사의 지배층으로 군림했던 보수파가 작금 지리멸렬하고 있다. 그 모습이 훈구파의 그것과 그리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500년 전 조선시대 훈구파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는 표현이 과하지 않아 보인다. 
대한민국이 수립된 후 권력의 중심에 섰던 보수 우파는 진보 좌파라는 정치세력의 도전에 잠시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으나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보수의 가치로 70여 년간을 버텨왔다. 그러나 훈구파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자만했다. ‘시대정신’에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채 권력에만 중독돼 엄습하는 민심이반을 눈치채지 못했다. 
반면 진보 좌파는 길게는 70여 년간, 짧게는 30여 년간 호시탐탐 권력을 노려 왔다. 결국 보수파의 자충수에 편승하면서 보수파에 비해 앞선 ‘시대정신’으로 권력을 잡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림파가 그랬듯 더 이상 보수파에 권력을 내주지 않으려 하고 있다. 진보 정권의 바람대로 보수는 분열했다. 훈구파가 그랬듯 보수파의 명맥을 이어줄 인물도 보이지 않는다. 
사정이 이런데도 보수파의 보루라고 서로 자처하는 한국당과 바른정당은 지루한 명분싸움만 하고 있다. 정치가 국민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정치를 걱정하는 시대, 단말마의 고통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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