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직선제와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물로 얻어낸 정치제도이다. 87년 개정헌법에 의해 지방자치제도가 부활된 것은 1991년이었으며, 1995년부터는 단체장 선거를 포함한 지방자치제도가 전면 실시되었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의원 소선거구제, 그리고 지방자치제도는 87년 체제를 유지하는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87년 체제가 유지되어 온 지난 30년 동안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그리고 통일지방선거에서 의미 있는 결과물을 얻지 못한 정당은 자연스럽게 도태되어 온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정당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책을 현실정치에 실현시키기 위해 권력을 쟁취하려는 집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당이 권력을 쟁취하거나 쟁취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그 존재의의를 상실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치현실은 어떠한가? 여당은 이미 권력을 쟁취하여 자신들의 정책을 현실정치에 반영하려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존재의의를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야당이다. 작년 4.13 총선에서 국민들은 우리나라 국회의원 선거제도를 잘 활용하여 어느 정당도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3당 체제를 만들어 주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은 야당이었지만 원내 제1당이 되면서 협치를 강조했다. 대통령 권력만이 정통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국민에 의해 선택된 국회 권력도 그에 못지않은 정통성을 가진 권력이니만큼 정부여당이 일방독주하지 말라는 것이 협치의 본질이었다.

3당 체제하의 정치구도는 작년 바로 이맘때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급속한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의 결과 탄핵에 찬성한 새누리당 의원들 중 일부가 탈당을 감행하여 바른정당이라는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면서 국민들에 의해 만들어졌던 3당 체제를 보수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4당 체제로 만든 것이다. 그런 점에서 4당 체제는 국민들의 정치적 의사가 반영된 정당체제라고 보기 어렵고, 그렇기 때문에 4당 체제는 언제든지 붕괴될 수 있는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는 정당정치 체제였다.

실제로 이러한 4당 체제는 지난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한 번의 재편기를 맞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탄핵정국을 거치면서 정국의 주도권을 갖게 된 제1당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18대 대선에서 패배했던 문재인 후보를 앞세워 대통령선거 국면에서 내내 앞서가고 있었다.

아마도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패배함으로써 무능한 대통령을 탄생시키고 그러한 대통령에 의한 국정농단사태를 맞이하게 한 책임보다도, 무능하고 무책임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커다란 분노가 그러한 후보에게 패배한 책임조차 상쇄하면서 문재인 후보와 더불어민주당을 적폐청산의 최적임자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난 5월 9일의 대통령 보궐선거는 문재인 후보가 다른 후보들을 압도하면서 승리하였다. 그렇지만 득표율은 41.1%에 불과했고, 2위 후보와 3위 후보의 득표율을 합한 결과는 1위 후보였던 문재인 후보를 앞섰다. 때문에 선거과정 내내 문재인 후보를 제외한 후보 간 연대와 단일화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연대와 단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각 후보들이 자신으로의 연대와 단일화를 고집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연대와 단일화의 결과가 꼭 긍정적으로만 나타나지 않았던 우리 정치사의 결과를 일부 후보가 반면교사로 삼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선거과정에서의 후보 간 연대와 단일화는 고도의 정치공학적 논리가 작용하는 문제로서 단순한 더하기 빼기의 수학적 사고를 가지고는 이룰 수 없는 문제였다. 결국 대통령 선거과정에서의 정당체제 재편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정당체제 재편의 2라운드는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각 정당이 지도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후에 새누리당에서 자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꿔 대통령 선거전에 임했던 자유한국당은 2위를 차지함으로써 보수정당의 본류임을 각인시켰고, 선거 후의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였던 홍준표를 당대표로 선출함으로써 강한 보수정당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기초 작업을 마쳤다. 홍준표 대표는 공공연히 박근혜 전 대통령을 출당시키고 친박을 청산하여 바른정당을 흡수 통합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이에 바른정당은 대선후보였던 유승민 의원의 측근인 이혜훈 의원을 당대표로 선출하여 자강론을 강화함으로써 일단 버티기에 성공하는 듯했다. 그렇지만 이혜훈 당대표가 뇌물수수 의혹에 휘말리면서 당대표를 사퇴하였고, 당내 자강론은 통합론에 대세를 넘겨주게 되었다. 자강론의 대표주자였던 유승민 의원은 공석이 된 당대표를 선출하는 11월 13일 전당대회에 스스로 당대표 후보로 출마함으로써 자강론의 불씨를 살리려고 하는 중이다.

한편 구 야권 진영의 정당 지도체제 정비도 통합론보다는 자강론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5월 10일 취임한 이후 협치를 강조하기는 했지만, 높은 국정운영지지도에 취해서인지 야권에게 협치의 여지를 만들어주려는 노력은 크게 기울이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의당에 대한 호남지지율의 우위를 앞세워 고강도로 국민의당을 압박했다. 결과는 인사청문회를 통해 예기치 않게 나타났다.

그럴수록 더불어민주당의 압박은 강해져 대통령 선거과정 중에 있었던 국민의당 당원의 제보조작사건을 두고 추미애 대표는 ‘머리 자르기’라며 국민의당을 몰아 붙였으며, 국민의당은 대통령 선거에서 3위에 그침으로써 정치생명이 다했던 안철수 전 대표가 염치불구하고 전당대회에서 당대표 출마를 강행, 당대표가 됨으로써 정당체제 재편의 2라운드는 자강론의 압승으로 정리되었다.

며칠 전 국민의당 싱크탱크인 국민정책연구원이 한국리서치에 의뢰한 여론조사 결과가 여의도 정치권을 강타했다. 각 당간 다양한 형태의 ‘합당’을 가정한 정당지지율을 조사한 결과, 국민의당이 바른정당과 통합했을 경우, 통합정당의 정당지지율이 19.7%를 기록해 자유한국당의 15.6%를 앞지르며 2위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통합 이전의 기존 정당 지지율의 합이 13.2%임을 감안하면, 통합할 경우 무려 6.5% 포인트의 지지율이 올라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론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는 바른정당 자강파의 대주주인 유승민 의원과 조만간 회동할 것으로 알려졌으며, 유승민 의원은 통합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햇볕정책과 호남지역주의로부터의 탈피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자유한국당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탈당과 친박청산을 통해 바른정당 통합파의 복당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니 현 상황은 정당체제 재편의 3라운드가 막이 올랐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현재 정당체제 재편 3라운드의 본질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재편의 도마 위에 오른 바른정당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혹은 바른정당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고, 다른 하나는 ‘내로남불’이다.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와 바른정당 유승민 의원은 길게는 1년 이상 이어져온 당내의 다양한 통합, 연대, 단일화론을 일축하며 자강론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구축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강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두 당의 지지율은 지난 몇 개월 동안 답보상태에 있으며, 정치적 결과물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자강을 이루어내지 못한 자신들의 무능에 대한 총체적 반성, 당원에 대한 사과, 결과에 대한 책임, 어느 것 하나 보여주지 않았다. 이들의 정치행태는 국민모두가 지켜보고 있기에 단순히 정당내부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정당불신으로 이어진다.

정당에 대한 불신은 곧 국회불신으로 직결된다. 정당의 구성원인 국회의원이 국회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합당을 통한 정당재편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이 점을 깊이 생각해서 처신해주기 바란다. 그것이 자신도 사는 길이지만, 책임 있는 야당의 자세이고, 내년 지방선거 후에도 생존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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