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촛불세력’의 정부에 대한 빚 독촉이 도를 넘고 있다. 특히 새 정부 탄생의 ‘공신’으로 자처하는 민노총은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청와대의 초청마저 거부하는 안하무인 격 태도를 보여 국민들의 빈축을 샀다.
마치 ‘상왕’ 노릇하려는 민노총의 자세도 비난받아야 마땅하나 이 같은 극렬 세력의 무리하고도 불합리한 요구에 대처하는 청와대의 어정쩡한 스탠스 역시 우려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들의 요구가 대부분 현실적이지도 않고 법규에도 어긋나는데 단호하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새정부의 이런 저자세 배경에는 민노총 등 촛불세력에게 정치적 빚이 있음을 인정하는 채무자 콤플렉스가 있는 듯하다. 문제는 정부가 이렇게 채무자처럼 비춰지게 되면 저들의 빚 독촉은 더욱 집요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진창 같은 정치판에서 정치적 빚을 갚으려다 나라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한 숱한 역사를 다 안다. 
광해군의 폐모살제(廢母殺弟)와 중립외교 정책 등을 빌미로 쿠데타를 일으킨 서인 덕에 왕위에 오른 인조는 재임 기간 내내 서인들에게 휘둘렸다. 자신의 힘으로 왕이 되지 못했으니 자신의 의지대로 정치를 할 수 없었던 결과는 아주 참담했다. 후금(뒤의 청나라)과의 중립외교를 버리고 명나라를 사대해야 한다는 서인의 강력한 주장을 따르다 병자호란을 야기해 청태종 홍타시 앞에서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를 하는 ‘삼전도 굴욕’을 당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청의 주장대로 군신 관계를 맺고 두 왕자와 강경 척화론자들이 인질로 잡혀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영조도 다르지 않다. 노론 덕에 왕이 된 그는 당시 만연한 붕당정치의 폐단을 없애고자 탕평책을 쓰는 등 안간힘을 다 해보았으나 노론에 진 정치적 빚을 탕감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소론 편에 선 사도세자를 제거하라는 노론 벽파의 종용에 굴복한 그는 끝내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이는 조선 최대의 비극적 기록을 남겼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한 맺힌 죽음을 목도한 정조에게도 비켜 못 갈 정치적 채권자가 있었다. 세손시절부터 고비 때마다 그를 구해준 홍국영 말이다. 정조는 자신의 등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홍국영에게 사실상 국정운영의 전권을 쥐어주는 10년 세도정치의 첫 기반을 닦았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개혁군주 정조의 갑작스런 의문사 후 다시 척족 세도정치 60년의 암흑기를 맞아 이를 극복하지 못한 조선은 멸망하고 말았다.
반면 조선 초 태종 이방원은 1·2차 왕자의 난에서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준 이숙번, 이거이, 척족 민 씨 일가 등 수많은 정치적 채권자들을 사정없이 제거했다. 그 결과 아들 세종은 정치적 채권자 하나 없는 태평시대를 구가할 수 있었다. 
물론 문재인 정부가 촛불세력에게 정치적 빚을 졌다고 해서 무리하고 불합리한 요구를 들어주지는 않을 것으로 믿는다. 다만 이들의 대규모 ‘빚 독촉’ 요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게 틀림없어 보여 불안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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