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게릴라 전을 벌이던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에서 1967년 10월8일 체포되어 다음 날 전격 처형되었다. 그 후 50년이 지났다. 헝클어진 머리에 큰 별이 박힌 베레모를 쓴 체 게바라 모습은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서 저항의 낭만적 상징이고 혁명의 아이돌(Idol:우상)로 추앙되었다. 하지만 그는 낭만적 혁명 아이돌이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무장 게릴라 두목이었다.
체 게바라는 1928년 아르헨티나의 중산층 아들로 태어났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피부전문의였다. 그러나 그는 여려서부터 칼 마르크스 와 블라디미르 레닌에 심취했다. 그는 1954년 멕시코에서 망명 중이던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매료되었고 그의 지하 조직에 가담했다. 체 게바라의 본명은 에르네스토 게바라였으나 게릴라 훈련 교관에게서 ‘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탈리아 말로 ‘단합’이란 뜻이다.
체 게바라는 “당신의 자유와 권리는 당신이 투쟁한 만큼만 당신에게 주어진다” “자유를 향해 투쟁하는 인민들의 단 하나 해결책은 무장투쟁“이라고 했다. 그는 ‘무장투쟁’을 주장하면서도 ‘자유’를 내세워 낭만적 혁명가로 위장했다.
하지만 체 게바라는 카스트로와 함께 1959년 1월 쿠바 공산주의 혁명에 성공하자마자 수백명의 바티스타 살디바르 전 정권 관련자들을 잔혹하게 처형했다. 그는 자유를 갈망하는 혁명투사처럼 ‘자유’를 말하면서도 수백명을 즉결 처형하는 잔혹한 독재자였다. 그는 1961년부터 1965년까지 카스트로 독재정권의 산업부 장관을 지냈고 2인자였다.
그러나 그는 전 세계로 혁명을 수출하라는 카스트로의 명령을 받고 1965년 쿠바를 떠났다. 콩고 와 탄자니아를 거쳐 다시 남미의 볼리비아로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벌였다. 하지만 볼리비아 국민들은 체 게바라 게릴라들이 양민을 폭행하며 부녀자를 겁탈하고 재물을 약탈한다며 모두 피신했고 동조하지 않았다.
체 게바라는 1967년 10월8일 깊은 산간 지역 ‘라 히구에라’에 나타났다가 주민의 신고로 군경과 교전 끝에 체포되었다. 그 때 그는 “나는 체 게바라다. 나를 죽이는 것보다는 살리는 게 당신들에게는 득이 될 것”이라고 했다. 혁명한다며 수많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던 체 게바라도 자기 생명만은 소중했던지 체포 순간 목숨을 구걸했다. 하지만 볼리비아는 다음 날 그를 처형해 암매장해 버렸다. 그는 피비린내 나는 게릴라였으나 39세의 미남이었고 시신은 30년 후에야 발견되었다.
체 게바라는 사후 젊은이들 사이에서 ‘혁명의 아이돌’로 추앙되었지만, 그의 공산주의 혁명은 모두 허구였음이 드러났다. ‘해방과 자유’를 위한다던 그의 쿠바 공산주의 정권은 카스트로 1인독재로 빠져 쿠바인들의 자유를 말살했다. 그는 ‘새로운 인간’을 창조한다며 바티스타 정권의 부정부패 척결, 관광산업 중단, 도박장 폐쇄, 매춘업 금지 등을 외쳤다. 하지만 쿠바인들은 아직도 관광산업과 매춘업 등에 의존해 연명하며 ‘새로운 인간’ 대신 ‘피곤한 인간’으로 짓눌려 산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쿠바를 탈출하려 한다.
체 게바라의 혁명은 현지 국민들에게서 배척당했다. 쿠바, 베네수엘라, 니카라과, 등 좌경국가들은 주변 국가들 보다 더 부패하고 빈곤하다. 그가 이상으로 삼았던 소련 공산정권은 아예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그 대신 체 게바라가 파괴하려던 자본주의 체제는 21세기 인류를 자유와 풍요로 이끌고 있다.
젊은이들의 저항 아이돌이었던 체 게바라의 사회주의 혁명은 수많은 생명만 헛되이 희생시켰을 따름이다. 체 게바라 처형 50년이 보여준 피비린내 나는 혁명 허구의 민낯이다.

■ 본면의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정용석 교수  ilyo@ilyoseoul.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