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 건립 두고 둘로 갈라진 대한민국

서울 상암동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사진=장원용 기자>
[일요서울 | 권녕찬 기자] 최근 때 아닌 ‘동상(銅像)’을 놓고 첨예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서울 상암동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 ‘박정희 탄생 100돌’을 기념하는 동상의 건립 여부를 두고 찬반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
 
나라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전직 대통령의 동상을 기념도서관에 짓는 게 뭐가 문제냐는 찬성 측과 역사적 논란이 큰 인물인 데다 건립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반대 측이 팽팽하게 맞서는 상황이다.
 
현재 관련 규정에 따라 이곳 부지를 소유한 서울시가 건립 여부에 대한 결정을 내릴 방침이다. 지난해 서울 광화문광장에 박 전 대통령 동상을 세우려다 무산된 바 있는 가운데 이번에도 좌초될지 서울시의 결단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박정희 탄생 100돌’ 맞아 길이 4.2m 대형 동상 건립 시도
찬반 나뉘어 서로 충돌…‘기습 설치설’에 폭행 사건까지 난장판
“산업화 공헌 위인 업적 기려야 vs 역사적 논란 크고 市부지에 안 돼”
키는 서울시 손에… 재단 측, “건립허가 신청 준비 중…당장 내일이라도”

 
마포구 상암동에 위치한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은 국비 200여억 원을 지원받아 2010년 초 첫 삽을 뗐다. 연면적 5290m²(1603평)의 3층 규모로 지어진 기념도서관은 공사 2년여 만인 2011년 11월 준공됐다.
 
기념도서관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후보 시절 내세운 공약과 연관이 있는데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역사화해’ 차원에서 박정희대통령기념관 건립을 약속했다. 하지만 10년 넘게 역사성, 위치, 비용, 부지 문제 등으로 논란을 거듭하다 2010년에 이르러서야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으로 용도와 명칭이 확정돼 착공에 들어갔다.
 
정부가 국고보조금 208억 원을 기념도서관 건립에 단계적으로 지원했고, 당시 고건 서울시장이 시유지(市有地) 무상 지원 의사를 밝혔다. 여기에 기념도서관을 소유하고 있는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이 모금한 370여억 원이 더해져 2012년 2월 첫 문을 열었다.

 
<뉴시스>
  논란 재점화
기증식 ‘아수라장’

 
기념재단 측은 박 전 대통령 탄생 100년(11월14일)에 맞춰 길이 4.2m, 무게 3톤의 박 전 대통령의 형상으로 청동 동상을 세울 예정이었다. 이 동상은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을 만든 김영원 조각가가 제작했으며, ‘이승만·트루먼·박정희 동상건립추진모임’이라는 시민단체가 이를 재단에 기증했다.
 
하지만 이달 초 기념재단이 기념도서관에 박 전 대통령 대형 동상을 세울 것으로 알려지자 일부 정치권과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공과(功過)에 대한 역사적 논란이 큰 인물을 시유지에 건립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마포구 시의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성명을 통해 “"대대적인 적폐 청산에 나선 현 시점에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이 오른 역사적 논란이 큰 인물에 대한 동상이 서울시 소유의 공유재산에 건립된다는 것은 교육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모두 심히 우려되는 일”이라고 밝혔다.
 
동상 설치를 앞두고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당시 기증 전날인 12일 기념재단이 동상을 기습적으로 설치할 것이라는 설도 빠르게 확산됐다.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해 지역 시민단체와 민주당, 정의당 지역 조직 등은 기습 설치에 대비해 대형 크레인을 저지하는 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다행히 기습 설치는 없었지만 기증식 당일인 지난 13일 동상 건립을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이 서로 고성과 욕설을 주고받아 기증식 일대는 아수라장이 됐다. 지지 단체들은 반대 시위를 하는 시민들에 ‘종북좌빨 물러가라’ 등 문구가 적힌 팻말을 들고 “좌파” “빨갱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에 반대 단체들은 ‘원조 적폐’, ‘헌정질서 파괴 주범’ 등이 적힌 팻말을 들며 맞받아쳤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몸싸움이 벌어지는 등 물리적 충돌도 발생했다. 경찰이 찬반 단체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으나, 반대집회 참가자와 기증식 참가자가 목 부위를 서로 때려 폭행 혐의로 현행범으로 체포되기도 했다.
 
기념재단 측은 이날 동상 건립식이 무산되자 진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좌승희 기념재단 이사장은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대통령기념관에 동상이 없는 곳이 없고 김대중, 노무현 기념관에도 동상이 있어야 제대로 된 나라라고 생각한다”며 “진영 논리에 따라 반대하고 소란을 피우는 것은 선진 시민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승만·트루먼·박정희 동상건립추진모임 박근 대표는 TBS라디오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몇십년 전 특히 우리나라 산업화를 위해서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공을 세웠다”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안 했다면 지금도 (산업화를)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박 전 대통령의 동상 건립을 촉구했다.

 
<뉴시스>
  서울시 ‘조례’ 의거
심의 절차 거쳐야

 
동상 건립을 반대하는 측은 절차 문제도 주요 반대 이유로 제시한다. 서울시는 과거 기념관 건립을 허가하면서 부지는 재단에 넘기지 않고 시유지로 유지했다. 대신 일정 기간 무상임대 형태로 부지를 빌려줬는데, 기념도서관이 시유지인 만큼 ‘서울시 조례’에 따라 동상 건립에 관한 심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2010년 제정된 ‘서울특별시 동상·기념비·조형물의 건립 및 관리기준 등에 관한 조례’에 따르면, 시 소유의 공공용지에 동상 등을 건립하려면 시에 건립 계획서와 사후관리 계획서를 제출해야 한다. 시는 해당 계획서에 대해 심의위원회를 구성, 허가 여부를 결정한다.
 
당초 재단 측은 “시로부터 무상 임대한 상황이므로 시의 동상 건립 심의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이었으나, 이후 심의 절차를 따르기로 했다. 기념도서관 관계자는 17일 “서울시에서 요구하는 서류 등 문제로 아직 건립 인가 신청을 하지 않은 상태”라며 “준비가 되면 당장이라도 신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시는 심의 요청 작업이 마무리되면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공공미술심의위원회를 소집해 심의에 착수할 방침이다. 동상이 박 전 대통령을 소재로 한 만큼 해당 부지와 관련해 역사적 적절성 여부 등은 역사학자 등의 자문을 받아 심의할 수 있다.
 
재단 측은 시 심의 절차를 통과하면 설치에 돌입해 연내 세운다는 계획이다. 만약 불허 결정이 내려진다면 행정소송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런 가운데 재단 측은 부지를 아예 구매하려고 했으나 서울시는 시민단체의 반발 등으로 그간 매각 절차에 어려움을 겪었다. 민족문제연구소 등은 기념도서관 부지 매각 절차 중단을 요구하는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내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 동상은 탄생 100년을 맞는 올해에 맞춰 지난해 광화문에도 설치를 추진하려다 무산된 바 있다. 지난해 11월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박정희 탄생 100돌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출범식에서 추진위는 이같은 뜻을 밝혔으나, 당시 국정농단 파문이 터져 나오던 시점이어서 시민들의 반발로 건립 계획이 잠정 보류됐다.
 
심의, 무사 통과할까
공공도서관 용도 필요 지적도

 
한편, 서울시에 따르면 공공미술심의위원회에 이미 완성된 동상이 심의 안건으로 상정된 적은 한 번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완성된 동상이라고 해서 심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지만 심의 결과 수정이 필요하면 동상을 그에 맞게 변경해야 한다. 이를 따르지 않으면 시유지에 설치할 수 없다.
 
계획서 그대로 승인이 되면 완성된 동상을 그냥 설치하면 되지만, 동상 크기가 너무 크다거나 특정 부분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되면 완성된 동상을 수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현재 동상은 기념 도서관에서 서북쪽 7km 떨어진 경기도 고양시 외곽에 보관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기념도서관이 ‘공공도서관’ 기능을 추가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2012년 개관 이래 5년이 흘렀으나 현재까지 도서관은 개관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시와 재단 간 협약서에는 ‘건물의 일부분을 도서관 용도로 사용한다’는 전제만 들어있을 뿐 개관시기, 규모 등의 세부적 내용이 게재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시의회 민주당 소속 시의원과 주민 등은 “(기념재단 측이) 애초 약속한 공공도서관의 역할을 버리고 공공재산의 사유화를 통해 박 전 대통령의 우상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동상 건립을 지지하는 측은 동상을 세우는 자체가 역사적 교육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장제원 자유한국당 대변인은 “동상을 건립하는 것은 나라 발전에 공헌한 위인의 업적을 되돌아보고 역사적 교훈을 얻기 위함”이라고 했다.
 
이어 “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한 산업화는 세계적으로도 높이 평가받고 있고 중남미 국가들에게는 경제 성장의 롤모델로 자리 잡았다”며 “비록 과오는 있으나 한국 근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업적을 남긴 탁월한 지도자였다는 점이 가려져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서울 상암동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주변 <사진=장원용 기자>
  한편,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에 따르면 국민 3명 중 2명은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건립에 반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리얼미터가 지난 15일 성인 511명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 결과(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4.3%), 동상 건립에 ‘반대한다’고 답한 비율은 응답자의 66.5%, ‘찬성한다’는 비율은 30.1%로 나타났다. 지지 정당 별로는 민주당과 정의당 지지층에서 반대 응답 비율은 90%를 넘었고, 한국당 지지층에선 찬성 응답이 91.3%가 나와 뚜렷한 의견차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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