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의존 사우디 경제를 현대적으로 변모시키려 노력
여자에게 자동차 운전 허용도 사회 풍조 쇄신의 일환


[일요서울 | 곽상순 언론인] 지난 4일 세계 최대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부패 척결을 명분으로 왕자 11명, 현직 장관 4명, 전직 장관과 기업인 수십 명을 체포하는 숙청 사태가 발생하면서 엄격한 이슬람국가 사우디가 연일 세계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이번 숙청을 주도한 사람은 32세의 젊은 왕세자 모하마드 이븐 살만이다. 살만 왕세자는 석유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해 온 사우디 경제를 미래지향적으로 변모시키고 숨이 막힐 듯이 답답한 이슬람 근본주의 전통을 지켜온 사우디 사회를 더 온건하게 만들려 한다. 주말의 숙청작업은 ▲2018년부터 여자에게도 자동차 운전을 허용한다 ▲지금부터 여자들도 스포츠 경기장에 입장할 수 있다는 정부 발표가 나온 지 며칠 만에 단행됐다. 서방 언론은 대체로 이번 사태를 ▲살만의 권력을 굳히고 ▲온건한 이슬람을 지향한다는 사우디의 몸짓을 나라 밖에 알리기 위한 행동으로 해석한다.

사우디에서 권력은 오랫동안 로열패밀리와 그 다양한 분파들 사이에서 단단히 장악돼 왔다. 18세기 알-사우드 가문이 오늘날 사우디의 주춧돌을 놓았을 당시, 아라비아 반도에는 수많은 베두인 부족이 거주하며 생존을 위해 서로 다투고 있었다. 이런 아수라장 속에서 사우드 부족은 이슬람 와하비 지파(支派) 추종자들과 제휴해 권력을 장악했다. 사우디 절대 군주는 중세 유럽의 어느 군주보다 더 권력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우디 반도에서 서로 싸우던 여러 부족들을 제압하고 우뚝 솟은 무하마드 빈 사우드 부족장은 1744년 종교 지도자 무하마드 빈 압둘 와하브와 손을 잡았다. 이때부터 와하브는 사우드 족의 무장투쟁을 전면 지원하고, 사우드는 와하비 지파의 종교 확장을 돕는 공생관계가 시작됐다. 와하브는 철저한 근본주의자로 그의 목표는 이슬람 초창기인 7세기의 종교적 열정을 사우디에 재현하는 것이었다.

와하브는 와하비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사우드 가문 사람들에게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했고, 빈 사우드는 와하비의 종교 영토 확장을 지원했다. 사우디 반도 거의 정중앙 디리야에 본부를 둔 사우드-와하브 동맹은 모든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이 과정에서 어떤 베두인 부족들은 사우드-와하브 동맹에 합류했고 또 다른 베두인 부족들은 저항했다. 1790년, 이 주도세력은 중앙 사우디에 경제·정치·군사 거점을 구축했다. 그들은 그들이 진출하는 곳이 어디든 그곳을 알라가 승인한 곳으로 간주했다. 오스만 터키가 수시로 그들을 괴롭혔지만 그들이 이집트 군대에 의해 전복된 것은 19세기 초에 이르러서였다. 사우드 가문은 지배 부족에서 추락했지만 부족들 다수의 충성을 확보하고 있었기에 반격을 시도한 끝에 권력 중심지를 리야드로 옮겼다.

19세기 내내 사우드 가문은 오스만 터키의 적대감에 시달렸다. 그러다 마침내 1890년대에 리야드에 대한 사우드 가문의 통제력을 빼앗기고 압둘 라만 빈 파이잘 휘하의 사우드 가문은 쿠웨이트로 달아났다. 당시 영국의 보호를 받고 있던 쿠웨이트는 사우드 가문이 힘을 기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의 아들 이븐 사우드는 마침내 리야드를 되찾고 1902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초대 왕이 됐다.

그로부터 30년에 걸쳐 사우디가 경제·정치적으로 번성하면서 사우드 가문은 아랍 부족들은 물론이고 오스만 터키와 영국의 엄청난 반대에 시달렸다. 역사학자 웨인 H. 보웬이 그의 책에 썼듯이 “중요한 아랍 부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집트, 터키, 영국 군대가 맹렬한 결의로 사우디 군대와 와하비 종교 교리에 맞서 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우드 가문은 영토를 계속 확장하고 내부 질서를 유지하며 오스만 제국의 멸망 후에도 살아남았다. 1912년 이븐 사우드는 최초의 직업적 군대인 이크완을 창설했다. 이븐 사우드는 리야드 탈환 때 영국 도움을 받았다. 그렇더라도 그는 사우디가 영국 보호령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사우디에서 석유가 처음 발견된 1920년대 이븐 사우드는 그 귀중한 자원을 미국과의 관계 형성에 사용키로 했다. 사우디와 미국 사이의 경제 관계는 그때부터 두 나라의 외교정책을 지배하게 됐다.

1930년대는 사우디 역사의 새 단계를 상징했다. 반도 여기저기에 현대식 대도시가 생기고 중공업이 속속 건설됐다. 이 시기 사우디는 중앙 집중화된 정부와 석유에 기반을 둔 안정적인 경제체계를 갖춘 현대적 국민국가로 변모했다. 국가적 예산과 조세제도가 자리를 잡았다. 이것은 그 지역의 문화·종교적 가치가 현대적 기술 사회의 요구에 그 자체를 적응시킬 필요성을 처음 발견한 때였다. 하지만 이븐 사우드는 어떤 중앙의 제도도 수립하지 않고, 대신 전통적인 부족의 형태를 따라 그에 대한 개인적 충성심을 통한 단결을 유지시키는 쪽을 택했다. 1953년 이븐 사우드가 죽자 자손들 사이에서 격렬한 권력투쟁이 일었다. 이는 특히 사우드 왕자와 파이잘 왕자 사이에 심했는데, 두 사람은 번갈아 가며 통치했다. 1958년 로열패밀리의 압력에 밀려 사우드 왕자는 왕이라는 명목만 유지키로 하고 실권을 파이잘에게 양도했다. 파이잘 왕자의 개혁 아래 사우디는 대규모 재정적 변모를 진행했다. 1964년 사우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유럽으로 망명했으며 이에 따라 왕위가 파이잘에게 넘어왔다. 모든 권력을 장악한 파이잘은 사우디 경제를 현대화해야 한다며 개혁을 세차게 밀어붙였다. 그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도입하고, 교육·수송·산업에 투자했다. 1970년대 말 사우디는 국민 기본생활에 필요한 인프라를 충분히 개발한 상태였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사우디는 이미 충분히 번성한 국가가 돼 있었지만, 이번에는 현대적 경제의 수요를 충족시킬 노동력이 충분치 않았다. 사우디의 전통 정서는 남자가 육체노동을 하는 것을 금했으며 여자는 외간 남자와 접촉할 가능성이 있는 어떤 외부 일도 하지 못하게 돼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20세기 말 사우디 노동력의 50%는 외국인이었다. 이 무렵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있었고, 이란 혁명이 일어났다. 너무 퇴폐적이고 서구 지향적인 이슬람 국가 군주에 대한 반감이 일었다. 2005년 즉위한 압둘라 국왕 하에서 사우디는 또 다른 단계의 현대화 개혁을 진행했다. 법제를 재정비하고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다.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사우디의 사회·경제적 시나리오는 여전히 상당히 음울하다. 청년 실업, 외국인 노동자와의 갈등, 현대화 추진 과정에서 급진세력을 화나게 하는 것에 대한 공포 등이 사우디 사회의 불안 요인으로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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