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4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탄생일이다. 이 날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행사’가 구미시 상모동 박 전 대통령 생가 일대에서 열렸는데, 좌파 시민·사회단체들은 생가 입구에서 박정희 유물관 건립 반대 기자회견을 열고 “혈세 낭비” “박정희 역사자료관 건립 중단”을 촉구했다. 하루 전 서울 마포구 상암동 박정희기념관 앞에선 박정희 대통령 동상 건립에 반대하는 좌파 단체의 집회가 열렸다.

좌파들은 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功)’에는 눈을 감고 ‘과(過)’만 부풀리는 외눈박이 시각에 갇혀있는 것일까. 왜 ‘박정희 지우기’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것일까. 그 연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좌파 계급투쟁론자들이 건국 대통령 이승만과 산업화 대통령 박정희를 부정해야만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잘못된 역사관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역사 속의 ‘박정희 정신’과 ‘박정희 공과(功過)’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인영 서울대 교수는 5.16 직전의 시대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거리는 실직자로 득실대고, 농민과 노동자는 기아와 궁핍으로 고통 받고 모든 공장은 폐쇄상태라 생산이 제대로 되지 못했다. 강도와 절도가 날뛰고 상이군경·학생들의 데모로 날이 지샜지만 4·19 직후에 탄생한 장면 정부는 치안능력이 무기력했다. 국민 모두 불평과 비탄에 잠겨 있었다. 그때 박정희가 나타났다”고 회상했다.

박정희는 1961년 제2군 부사령관으로 재직 중 5.16을 주도하여 집권한 후 18년 5개월 동안 수출주도와 중화학공업육성, 외자도입 전략으로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
 
박정희의 정치철학은 맹자의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 생업이나 재산이 없으면 올바른 마음가짐도 없다)’으로 귀결된다. 산업화를 이루면 민주화 기반이 마련된다는 ‘선(先)경제개발 후(後)민주화’ 국가발전전략이다.

그는 민주주의와 자유도 그것을 지탱할 수 있는 경제력이 없으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20세기 많은 신생국들은 ‘민주화 우선’, ‘경제와 정치 동시 발전’을 추구했지만 모두 실패한 사례에서 박정희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이 입증된다.

박정희의 외교전략은 실학사상(實學思想)에 기반을 둔 실리외교로 귀결된다. 한·일 국교 정상화를 논의한 청와대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 박정희는 “오늘 우리 결정에 대한 판단은 후세에 맡기자. 하지만 이 일은 지금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비장한 말을 했다. 이때 들여온 돈으로 경부고속도로·포항제철 등을 건설하며 경제발전의 토대가 마련됐다.
 
박정희는 야당으로부터 한일국교 정상화를 추진한다고 하여 ‘매국노’라는 욕을 들었으며, 월남에 국군을 파병한다고 하여 ‘젊은이의 피를 판다’는 악담을 들어야 했다. 서독의 돈을 빌려서 경제건설을 앞당기겠다는 노력에 대하여 ‘차관 망국’이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그러나 박정희는 “내가 잘 했는지 못했는지는 역사가 증명할 것이다” 라며 자신 있게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말했다.

박정희는 5000년 역사의 숙원인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했고, 남북한 체제경쟁에서 자주국방론으로 김일성과 싸우지 않고 이겼다. 박정희의 한일협정 체결은 한국 외교사를 통틀어 이승만의 한미동맹 체결과 함께 가장 잘한 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1월 8일 국회에서 “끔찍한 전쟁의 참화를 딛고 일어나 가장 부강한 국가의 반열에 올랐다”고 대한민국을 한껏 치켜세웠다. 숙명과 같은 가난과 좌절에서 세계 12위 경제대국 반열에 올린 주역은 누가 뭐래도 박정희다. 그러나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과 구속에 이어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다 결정된 ‘박정희 기념우표 발행’이 이유 없이 취소됐다. ‘박정희 정신’이 5년마다 되풀이 되는 이념전쟁의 도구로 전락된 것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 속의 인물을 부정하면 남아 날 역사는 없다. 집권세력이 ‘박정희 지우기’에 올인 하는 것은 역사 해석권을 악용하는 또 다른 적폐청산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정부는 국민화합 차원에서 박정희 기념우표를 발행해야 한다. 또한 근대화와 번영을 견인한 한국형 성장모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새마을운동도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박정희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은 이미 그가 1963년에 쓴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책의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시민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독립이 된 한국이 나의 꿈이다”라는 마지막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잘 살아 보자”는 박정희의 불굴의 용기와 리더십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는 지금과 훨씬 다른 세상을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노산 이은상 선생은 “박정희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합해놓은 인물이다”라고 평가했으며, 박명호 동국대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적 유산은 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고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권불십년화무십일홍(權不十年花無十日紅, 십년 가는 권세 없고 열흘 붉은 꽃 없다)’이라는 말이 있다. 되풀이 되는 단절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유산을 갉아먹는다. 대한민국의 성취를 이끈 ‘박정희 정신’을 5년짜리 이념적 잣대로 왜곡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은 과연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나라의 새로운 도약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후대들이 한국 현대사에 끼친 ‘박정희 공과(功過)’를 객관적으로 조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바로 봐야 한다. 그것이 역사 속의 인물에 대한 포폄(褒貶)에서 오류를 범하지 않는 방법이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