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제 설정 기능 잃은 국회, 국민도 외면한다

<뉴시스>
[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 국민들 사이에서 청와대 홈페이지가 인기다. 특히 홈페이지 메뉴 중 국민소통광장 속 국민청원 페이지는 과거 포털 다음의 토론‧청원 채널 아고라 못지않다. 청와대는 문재인 대통령 취임 100일이었던 지난 8월 17일 청와대 홈페이지를 전면 개편했다. 국민청원 페이지는 홈페이지 개편 이틀 후인 지난 8월 19일부터 열렸다. 청와대는 국민청원 페이지를 통해 정부와 청와대를 향한 국민의 의견을 직접 받고 있다. 과거 국민의 청원 창구는 국회였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이 적고 처리 과정도 투명하지 못해 만족스럽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게다가 국회가 하루가 멀다 하고 정쟁만 일삼다 보니 신뢰도가 바닥을 쳤던 바 있다.
 
직접 민주주의의 새로운 창구 ‘국민청원’ 순‧역기능 ‘공존’
유승민 “靑, 국민청원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일 주도해 나가려"


‘국회의원 보좌관 1명으로 줄여야 합니다’ ‘장충기법(언론인부정청탁방지법) 입법을 청원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키우기가 점점 겁이 납니다’ ‘미혼모에 관한 정착‧지원 등도 좀 더 넓혀주세요’ ‘이럴거면 단거리 전용 택시를 만들어주세요’ ‘비트코인 때문에 자살할까합니다’ ‘장시호 특별사면 해 주세요’
 
청와대 국민청원 페이지에서 12월 8일부터 시작하는 청원 내용들이다. 정치, 사회, 경제, 육아, 반려동물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청원들이 다양하게 올라오고 있다. 8일 오전 10시 기준 이날부터 청원을 시작한 건수는 이미 130여 건이 넘는다. 이쯤 되면 ‘현대판 신문고’라 불릴 만하다. 국민권익위원회에도 국민신문고가 운영되고 있지만 참여 열기는 사뭇 다르다.

청와대는 국민청원에 게시된 청원 가운데 30일간의 청원 기간에 20만 명 이상의 추천을 받은 청원에 한해 답변한다는 내부 지침을 정했다. 청원 마감 후 30일 안에 청와대의 수석, 각 부처의 장관 등 책임 있는 관계자가 답변하는 것이 원칙이다.

국민들이 국민청원을 찾는 이유다. 국민의 청원에 대해 정부 관계자가 직접 답변을 해 주니 참여 열기가 더 높을 수밖에 없다. 기존 청원 창구였던 국회나 국회의원의 태도와는 180도 다르다.
 
문재인 대통령
“청원 접수 바람직한 현상”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0일 “어떤 의견이든 참여인원이 기준을 넘은 청원들에 대해서는 청와대와 각 부처에서 성의있게 답변해 주시길 바란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후 여민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 회의 모두발언에서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청원이라도 장기적으로 법제를 개선할 때 참고가 될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또 “국민청원 게시판에 청원이 많이 접수되었다. 참여인원이 수십만 명에 달하는 청원도 있고, 현행 법제로는 수용이 불가능해 곤혹스러운 경우도 있다”면서 “그러나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의견이든 국민들이 의견을 표출할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청와대 홈페이지의 국민청원 페이지는 직접 민주주의 창구로서 새로운 성공 사례다. 물론 순기능만 있는 건 아니다. 국민청원 페이지에 올라오는 청원들이 정부 정책과 입법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지만 막무가내식 청원이나 정치성이 짙은 민원 등도 무분별하게 올라오고 있다.
 
유승민 “국회가 제대로
안 해서 그렇다”

 
여의도에서는 청와대가 모든 민생 이슈들을 선점하고 있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전통적인 국민청원 창구는 국회와 국회의원들이었다. 하지만 요즘 우리 국민들은 국회를 찾는 것보다 청원 페이지를 찾는 걸 더 편리해 하는 게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유시민 작가는 지난달 30일 방송된 JTBC ‘썰전’에서 “국회나 정당이 의제 설정 기능을 잃고 있다”며 “국민들이 답답하거나 간절하게 원하는 게 있으면 청와대 청원사이트로 가져간다”고 말했다.

이어 유 작가는 “옛날 같으면 헌법재판소나 국회의 정당으로 오던 민원들이 다 청와대로 가고 있다”며 “청와대가 응답하면서 사람들의 생활과 밀착돼 있는 관심사를 슬금슬금 표 안 나게 땡겨 먹고 있다. 반면 국회는 국회대로 정쟁에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게스트로 출연한 유승민 바른정당 대표도 “국회가 제대로 안 해서 그렇다”며 “청와대 청원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지금은 국회에 비해 발 빠르게 움직인다”고 인정했다.

유 대표는 방송 출연 직전인 지난달 28일에도 청와대의 국민청원 페이지 운영에 대해 “국가 기구는 정상적으로 작동을 해야 하는데 청와대는 국민청원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일을 주도해 나가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쓴소리를 했다.

유 대표는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국회의원 연석회의에서 “모든 정책이 대통령과 비서진을 중심으로 이뤄지면 최순실 국정농단과 같은 비선실세가 청와대에서 힘을 쓰며 국정을 주무르고 정상적인 기구인 정부부처는 청와대 입만 쳐다보게 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다양한 청원 주제 속
찬성 20만 건 넘은 청원 4건

 
정치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청와대 청원 페이지는 국민들의 높은 참여가 이어지고 있다. 페이지 운영 4개월이 조금 안 됐지만 이미 찬성인원 20만 건을 넘긴 청원은 4건이나 된다.

청와대는 이미 청소년 보호법 폐지, 낙태죄 폐지, 조두순 출소 반대(주취감형 폐지) 청원에 대한 답변을 발표한 상태다. 청와대의 답변이 국민들의 요구를 충족시켰는지와는 별개로 청원을 통해 해당 이슈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사회적 논의가 활발해진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현재 4번째 청원인 권역외상센터 제도‧인력 지원 건에 대한 청원자수가 25만 명을 넘었다. 하지만 아직 청원기간이 지나지 않아 청와대의 답변은 나오지 않은 상태다.

이 밖에도 베스트청원 목록을 살펴보면 참여인원이 5만 건이 넘는 청원 건수는 8일 기준 총 8건이다. 이중 눈에 띄는 청원은 ‘이명박 전 대통령 출국 금지 청원’이다. 이 청원은 지난달 10일 시작돼 찬성이 10만4000건을 넘겼다.

또한 교원 성과급 폐지 청원 찬성이 8만2000건을 넘었고 어린이집 평가인증 폐단 청원은 찬성이 5만5000건을 넘겼다.

8일 문재인정부의 첫 정기국회가 끝나고 임시국회가 11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된다. 하지만 올 정기국회는 민생국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임시국회도 다르지 않을 전망이다.

임시국회에서 다뤄질 주요 법안은 공수처 설치법, 국가정보원법 개정안, 근로기준법(근로시간 단축),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 등이다.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규제프리존법 등도 다뤄질 예정이지만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오는 청원 내용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만큼 국민들의 관심을 얼마나 끌지는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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