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 신현호 기자] 기부금을 모집해 원래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사적으로 유용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모금단체가 ‘우울한 연말’을 우려하고 있다. 불경기에도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 십시일반 내놓은 돈이 엉뚱한 곳에 사용되면서 국민들의 기부 심리가 꽁꽁 얼었기 때문이다.
 
이는 장기적으로 기부 문화와 비영리 단체 운영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투명성과 신뢰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전문가는 지적한다.
 
최근 국민들의 기부 심리에 가장 큰 충격을 안긴 건 지난해 터진 ‘국정농단 사태’다. 기업들은 미르·K스포츠재단에 많게는 수백억 원을 기부했다가 국정농단에 연루되면서 곤욕을 치렀다.
 
실제로 이는 올해 기부에 영향을 미쳤다. 기업경영성과 평가사이트 CEO스코어에 따르면 올해 매출 기준 국내 상위 500대 기업 중 기부금 내역을 공시한 257개 기업의 기부금 집행 규모(1~3분기)는 총 9788억 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1조1299억 원)보다 13.4%나 감소한 수치다.
 
올해에는 기부단체 ‘새희망씨앗’의 100억 원대 기부금 비리 사건이 터졌다. 이 단체 윤모(54) 회장과 김모(37·여) 대표는 소외계층 아동·청소년을 돕는다며 약 4년간 5만여 명으로부터 기부금 명목으로 거액을 받아 챙긴 혐의로 지난 9월 재판에 넘겨졌다.
 
경찰에 따르면 윤 회장 등은 지난 2014년 2월 1일부터 약 3년간 4만9805명의 시민에게 지역사회와 연계된 소외계층 청소년에게 후원을 부탁하는 명목의 전화를 걸어 모금한 128억3735만원 중 126억 원 가량을 가로챈 혐의를 받았다.
 
소외계층 아동청소년 후원 명목으로 128억 원이 넘는 기부금을 모았지만, 실제로 기부된 금액은 1.7% 수준인 2억 원여에 불과했고, 이마저도 복지시설에서 잘 쓰이지 않는 태블릿PC 800여 대와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인터넷 강의 등을 구매하는 데만 쓰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들은 혐의를 대부분 부인하고 있다. 지난달 10일 열린 첫 공판기일에서 윤 회장 측 변호인은 검찰이 공소 제기한 업무상횡령·상습사기·기부금품모집에 관한 법률위반·정보통신망법위반 4가지 혐의 중 정보통신망법위반에 관한 공소사실만 인정하고 나머지 혐의는 모두 부인했다.
 
이런 가운데 ‘어금니 아빠’ 이영학 사건까지 더해졌다. 딸 친구를 유인해 추행·살해한 뒤 유기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 ‘어금니 아빠’ 이영학은 12억 원대 후원금을 유용한 혐의가 드러났다.
 
직장인 A(33)씨는 “당연히 내 돈이 제대로 쓰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부를 하지 않겠느냐”면서 “그런데 이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기부를 망설일 수밖에 없다. 한 번 신뢰가 무너지면 해당 단체뿐 아니라 다른 곳도 의심을 받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까진 기부금이 급감하진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구세군은 올해 모금 목표액을 지난해보다 올렸다. 구세군자선냄비본부 관계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12월은 집중모금 기간으로, 지난해 이 기간 목표액은 78억 원이었지만 올해는 80억 원”이라며 “일련의 불미스런 사건이 있었지만 건강한 시민의식을 가진 시민들의 동참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역의 사정은 다르다.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지난달 20일 ‘희망2018나눔캠페인’을 시작했는데 현재 사랑의 온도탑 온도는 7.6도(7억400만 원)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15.8도(14억3000만 원) 절반 수준이다.
 
사랑의 온도탑은 캠페인 기간 모금 상황을 온도계로 볼 수 있게 돼 있다. 모금 목표액 1%를 달성할 때마다 1도씩 올라간다. 올해 목표 모금액은 92억6000만 원이다.
 
다른 단체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경남지역본부 역시 개인 기부자들이 부쩍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비영리단체와 모금의 신뢰성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라고 지적한다. 미국 같은 이른바 ‘기부 선진국’은 비영리단체 정보공개와 투명성을 강조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국가가 규제하지 않고 자기규제를 하도록 유도한다.
 
지난 5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한국 필란트로피 소사이어티(KSoP) 창립기념 국제포럼에 참석한 에바 올드리치 CFRE 회장은 “미국에서도 끔찍한 모금 사기가 있었다”며 “비영리단체가 더 많은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 신뢰감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장밋빛 활동을 담은 사진뿐 아니라 도전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까지 기부자들에게 정직하게 공개하고 궁금증이 남지 않을 정도로 설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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