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범행 동기 ‘가진 자들의 횡포에 대한 대항’, ‘대학입시 부정’ 등으로 돌려
검거 강력반장, 고병천 씨 2015년 광운대서 지존파 주제로 박사 논문 받아

 
“압구정동 야타족 등 돈 있는 사람들을 다 죽이지 못한 게 억울하다”
 
1994년 9월 20일. 추석 연휴의 마지막날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어졌다. 희대의 살인 집단인 ‘지존파(至尊派)’ 두목 김기환(당시 26), 강동은(21), 강문섭(20), 김현양(22), 문상록(23), 백병옥(20) 등 6명이 수갑 찬 모습이 세상에 처음 공개된 것이다. 그들은 평균 22세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악마의 대리인’이라고 불렀다. 오로지 살인을 하기 위해 아지트를 지었다. 아지트의 지하엔 사설 감옥과 시체 소각장까지 만들었다. 5명을 살해한 그들은 그곳에서 인육에 입을 대기까지 했다.
 
이들은 공원묘지에서 벌초하던 중소기업 사장 부부, 혼자 길을 걸어가던 20대 여성 등 5명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이들 중 일부는 담력을 키운다며 인육을 먹었고, 증거를 없애려고 시신을 불에 태웠다. 극악무도한 범죄에 전 국민이 경악했다. 이들이 살인 행각을 일삼은 아지트에서는 납치한 피해자를 감금할 수 있는 철창과 시체를 소각하는 화덕이 발견됐다.
 
차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은 모두 20대 청년들이었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이들은 1993년 7월 포커를 치다 두목 김기환을 만나 지존파를 결성했다. ‘부자를 저주한다’는 강령까지 만들고 백화점 고객명단을 빼내 범행 대상을 물색하는 등 부유층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이런 지존파를 일망타진한 것은 고병천 전 서울 서초경찰서 강력반장(당시 경위)이었다. 검거 당시 그의 머리가 빛을 발했다. 여자는 어머니도 믿지 말라’. 지존파의 행동강령이었다. 그런데 주범 김현양이 서울에서 납치해 온 여자 L씨를 좋아하게 됐다.
 
L씨는 지존파의 강요로 납치돼 온 사람을 살해해야 했다. 김현양은 L씨도 공범이 됐으니 살려두자고 주장했다. 반대하는 일당들과 주먹다짐까지 했다. 결국 김현양이 머리를 다쳐 병원에 가야 했고, L씨가 함께 병원에 갔다. 김현양이 수술실에 들어가게 되는 바람에 L씨에게 도주의 기회가 왔다.
 
L씨는 그 길로 서울로 올라와 서초경찰서를 찾아갔다. 고 전 반장과 6명의 강력 1반 형사들은 L씨를 따라 전남 영광군에 있는 아지트로 내려갔다. 그는 섣불리 아지트를 덮치지 않았다. “아지트 밖에서 잡아야겠다”고 판단했다.
 
아지트 안엔 다이너마이트 25개와 망원렌즈가 달린 장총 등 위험한 무기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오전 6시. 지존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곱 명 중 두 명이 해장국을 끓이기 위해 콩나물을 사러 나서는 길이었다. 범인들의 차량을 미행하다 뒤에서 들이받았다. 그 자리에서 두 명을 잡았다.
 
다음은 유인작전이었다. 고 전 반장은 2009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파출소에 가 아지트로 전화를 했다. ‘교통사고가 나 두 명이 많이 다쳤다. 모두 광주로 후송했으니 파출소에 와 차를 찾아가라’고 했다는 것.” 지존파는 의심이 많았다.
 
파출소로 온 범인은 세 명. 한 명만 내려 상황을 살피는 사이 경찰이 덮쳤다. 차량 속 두 명은 도주하다 인근 주유소 담벼락을 들이받고 검거됐다. 아지트에 두 명만 남아 있을 때 비로소 총기를 발사하며 급습했다. 일망타진이었다.
 
고 전 반장은 “영광군으로 출동할 때 서장님한테도 ‘나를 믿어 달라. 범인 잡아 오겠다’고만 하고 사건 내용은 보고하지 않았어요. 보고했다면 워낙 큰 사건이라 대단위 작전이 이뤄지고, 사상자가 생겼겠죠.”라고 말했다.
 
이들은 검거된 직후 뉘우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범행 동기를 ‘가진 자들의 횡포에 대한 대항’, ‘대학입시 부정’ 등 사회 부조리로 돌렸다.
 
지존파 사건은 인명 경시와 물질만능주의, 사회 양극화와 상대적 박탈감, 입시 위주의 교육 등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과 구조적 문제를 총체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지존파 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부녀자 연쇄 납치살인 사건인 ‘온보현 사건’까지 터지자 인간성 회복을 위한 범사회적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경찰은 공조수사의 허점을 보강하기 위해 광역수사단을 창설했다. 하지만 1996년 지존파를 모방한 ‘막가파’ 일당이 검거돼 또 한 번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다. 대법원은 1995년 5월 27일 지존파 일당에게 살인·사체유기·사체손괴·범죄단체조직죄 등을 적용해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고, 약 5개월 뒤인 같은 해 11월 2일 사형이 집행됐다.
 
한편, 고병천 전 반장은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범죄학 박사가 됐다. 고 전 반장은 이 사건을 주제로 한 ‘범죄단체 구성원의 행동패턴에 관한 연구-지존파 사건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써 2015년 2월 광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 전 반장은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사건을 논문 주제로 삼은 데 대해 “30여 년의 형사 생활에서 무조건 사람을 죽이고 돈을 빼앗기로 작정하고 범죄를 저지른 조직은 지존파가 유일할 정도로 이들의 범죄는 특이한 점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1976년 순경으로 경찰 생활을 시작한 고 전 반장은 지존파 사건 외에도, ‘앙드레김 권총 협박 사건’ 등 숱한 강력 사건을 해결하며 베테랑 형사로 이름을 날리고 2009년 34년간 정든 경찰을 떠났다. 이후 2013년부터는 광운대 범죄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다.
 
그는 앞서 경찰 재직 중이던 지난 2002년 한성대 마약학과에서 석사 과정을 이수하고 2007년에는 수필집도 출간하는 등 남다른 학구열을 보이기도 했다. 논문은 지존파 두목 김규환을 비롯해 조직원 6명을 리더형·창의형·계획형·추종형·모방형·우발형 등 6가지 행동 패턴으로 분석했다.
 
논문은 김규환이 조직을 꾸리는 한편 전남 영광에 살인을 위한 아지트를 직접 구상하기도 했지만 행인을 상대로 계획에 없던 범행을 저지르기도 했다는 점에서 리더형·창의형·계획형·우발형으로 분류했다. 논문은 또한 김규환의 지존파 결성을 여러 사회학 이론을 통해 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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