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심해진 불면증으로 상담을 요청해 온 환자 하 씨(48세, 여)가 있었다. 그는 ‘그 날'의 사건 이후 매일 밤 수면제 없이는 잠에 드는 것도 힘들고, 중간에 깨면 도저히 숙면을 취할 수가 없다고 호소했다. 가끔씩 스트레스받았던 일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올라 얼굴이 상기되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답답해 한숨을 자주 쉰다고 했다. 상담결과 하 씨는 3년 전 남편을 사고로 잃은 과부(寡婦)였고 여러 증상과 진맥상태, 신체 반응을 종합해 보니 화병(火病)으로 진단되었다.

화병(火病)이라 하면 원래 민간에서 쓰이는 정신과 관련 병명으로 다른 말로는 ‘울화병(鬱火病)' 이라고도 한다. 울화(鬱火)란 즉 억울한 일, 분한 일, 속상한 일 등을 당했을 때마다 화를 제때 밖으로 표출하거나 풀어버리지 못해 오랜 기간 동안에 걸쳐 가슴에 화가 울체되어 맺힌 것이다. 이 억압된 화(火)가 신체증상으로 나타난 것이 곧 화병(火病)이다. 참고로 서양의학에서는 이 화병(火病)을 우울증, 불안증, 자율신경실조, 분노조절장애, 충동조절장애 등과 관련지어 설명한다.

화병(火病)을 앓는 사람들 대부분은 사람과의 관계, 가족, 직장 문제 등으로 스트레스를 받아 오랜 기간 참아왔기 때문에 마음의 상처가 곪을 대로 곪아 있어 쉽게 치유되지 않는 편이다. 일단 화병이 생기면 심리적인 증상과 더불어 신체적인 증상까지 나타나게 되는데 이 증세는 기분이 괜찮을 때는 조용하다가도 자극이 있는 상황이 온다면 격하게 몰아치는 것이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화병 자가진단법에 따르면 ▲ 가슴이 매우 답답하고 한숨을 자주 쉰다. ▲ 숨이 막히고 목, 명치 아래가 답답하다. ▲ 열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낀다. ▲ 가슴이 두근거리고 벌렁벌렁 뛴다. ▲ 입이나 목이 자주 마른다. ▲ 두통이나 불면이 심하다. ▲ 억울하고 분한 감정이 자주 든다. ▲ 이유 없이 화가 나거나 분노한다. ▲ 마음의 응어리나 한이 있는 것 같다. ▲ 깜짝깜짝 놀라거나 두려워 한다. 이 중에 3가지 이상의 증상이 있거나 하나라도 6개월 이상 지속되었다면 화병을 의심해볼 수 있다. 또한 최근에는 화병면담검사(HBDIS)가 개발되어 신뢰도와 타당도가 검증된 화병의 진단척도로 이용한다고 한다.

화병을 진단하려면 이러한 신체증상들과 더불어 전통적인 한의학적 진단법을 통해서 확진할 수 있다. 화병의 두드러지는 맥상(脈象)은 현맥(弦脈 : 맥이 곧고 길어 마치 가야금 줄과 같을 때)이 두드러지며, 열이 많은 환자들은 삭맥(數脈: 빠른 맥), 병이 오래되어 우울증세가 겸해 있을 때는 침맥(沈脈)이 많다. 이러한 맥상(脈象)들을 토대로 환자의 전반적인 신체 상태까지 유추해낼 수 있다. 또한 경락상 ‘복모혈진단' 을 통해서도 화병을 진단할 수 있다. ‘복모혈진단' 이란 장부의 기가 흉복부의 특정한 혈자리에 모이는 것이라는 이론 하에 만들어진 한의학적 복부촉진 진단방법이다. 화(火)의 사기가 심경락, 심포경락(심포는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주머니) 등에 존재한다면 반드시 심경락의 복모혈인 거궐혈(명치아래) 과, 심포경락의 복모혈인 전중혈(양 유두의 정중앙 지점)을 압진했을 때 통증이 심할 것이다. 본인이 화병이 의심된다면 이 경혈을 눌러서 진단에 응용해보시길 바란다.

화병(火病)은 충격기, 갈등기, 체념기, 초월기의 총 4단계로 진행하게 된다. 충격기는 갑작스런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직후로 분노, 증오, 배신감 등 극한 감정 상태이다. 갈등기는 충격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만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알기에 심한 내적 갈등이 생겨난다. 이 갈등기가 본격적인 화병의 시작이다. 이 시기에는 환자에게 열감이 많이 느껴지며 화(火)가 심장에 들끓는 시점이다. "생각나면 화가 치민다. 억울해 죽을 것 같다." 라는 표현을 많이 하게 된다. 체념기에는 주로 "이 모든 불행은 내 팔자인가 보다. 어쩔 수 없다. 받아들이자" 라고 표현하며 화(火)가 심장에 울체되어 가는 단계이다. 체념했다고 해서 화(火)가 꺼진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자극만 있다면 더 크게 폭발할 수 있는 ‘용암을 품은 화산'과 같은 시기로서 이 시기에는 여러 신체증상들이 함께 나타나게 된다. 초월기는 이 모든 것들을 초월하여 한(限)이 맺히게 되는 시기이다. 초월하였다고 해서 병을 극복했다고 말하는 것인지, 아직 병이 진행 중이라고 봐야 하는지는 아직도 여러 논란이 있다.

한의학에서 화병의 치료는 증상을 고려하여 변증치료를 실시하게 된다. 주로 상부의 화(火)를 내려주고 울체된 기(氣)를 소통해주는 방법을 쓰는데 대표적인 처방으로는 가미귀비탕(加味歸脾湯), 청심온담탕(淸心溫膽湯), 교감단(交感丹) 등이 사용된다. 가미귀비탕(加味歸脾湯)은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안·초조해서 잠도 잘 안 오며, 식욕이 없고 소화가 잘 안 되며 빈혈기도 있는 허증이 심한 환자에게 사용하고, 청심온담탕(淸心溫膽湯)은 상부에 화(火)가 집중되어 열이 자꾸 치밀어 오르고 화가 나며, 깊은 수면이 힘들고, 얼굴이 화끈거리고, 입이 마르는 환자에게 사용하며 허증보다는 열증이 심할 때 주로 사용한다. 교감단(交感丹)은 화병으로 인해 서로 떨어져 있는 심장의 화기(火氣)와 신장의 수기(水氣)를 서로 소통하도록 도와주는 처방으로 수화상제(水火相濟)를 목표로 하여 근본치료를 하기위한 처방이다. 또한 전문기관에서는 한의학적 심리요법으로 이정변기요법(移精變氣療法), 지언고론요법(至言高論療法), 경자평지요법(驚者平之療法), 정서상승요법(情緖相勝療法), 호흡명상요법 등을 활용하여 화병을 치료를 돕고 있다.

‘내게 상처를 주는 사람은 바로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 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내 상처를 가장 잘 치료할 수 있는 사람 또한 바로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 일 것이다. 실제로 화병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해서는 가족과 주변 가까운 사람들의 이해와 배려가 필수적이다. 가족과 주변사람들이 환자의 가슴속 간절한 사연을 진실하게 들어주고 격려해주고 믿음을 줄 때 화병의 치료율이 증대된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또한 좋아하는 취미, 운동, 종교 등에 집중하여 자신만의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을 가지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반면 술, 담배, 카페인 등은 스트레스 해소에 일시적으로는 도움이 되는지 모르나 이들은 중독성, 의존성이 높으므로 지속되다 보면 신체에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정리=김정아 기자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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