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원하는 사업 믿고 돈 냈는데…’ 비자발적 기금 줄일 것


[일요서울 ㅣ이범희 기자] 오는 2월 9일 평창동계올림픽이 개막한다. 전 세계인의 축제인 만큼 우리나라를 찾는 선수는 물론 그 관계자들, 해외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다. 하지만 국내 반응은 냉소적이다. 재계는 특히 그러하다.

이맘때쯤이면 ‘평창 특수’를 누릴 만도 하지만 조용하다. 오히려 기업 내부에서는 정권 눈치보인다는 이야기까지 나돈다. 왜 그런 것일까.

재계의 한 관계자는 최순실 여파를 꼽는다. 최순실 사태 이후 기업의 사회공헌을 뇌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조성됐고, 주요 그룹 오너들이 미르 K스포츠재단 모금 등으로 곤욕을 치른 탓이다.

이 관계자는 “전 정권 당시 정부의 입김에 못 이긴 전경련 회원사들이 할당받은 대로 미르·K스포츠 재단 등을 후원했다가 단체로 사지로 몰렸던 게 바로 엊그제 일”이라며 “대기업 총수들이 줄줄이 불려가 곤욕을 치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심지어 이 사건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현 정부는 재벌개혁을 기치로 내걸고 있다.

후원하고 싶어도 나서기 곤란

이에 따라 자칫 현 정권이 추진한 행사에 낸 후원금이 다음 정권에서 타깃이 될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을 넘어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 일종의 공포증(포비아·phobia) 수준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포비아는 심리 객관적으로 볼 때 위험하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은 상황이나 대상을 필사적으로 피하고자 하는 증상을 말한다.

사정당국의 수사가 최근처럼 이뤄지는 것이 초유의 일인데다 이런 식의 수사가 이뤄지면 살아남을 곳이 없다는 자조 섞인 말들이 기업 내에서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에 롯데 등 다수 그룹이 총수의 재판 등으로 어수선한 상황도 후원·지원 위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롯데의 경우 한국e스포츠에 후원금 3억3000만 원을 낸 뒤 검찰조사를 받게 됐다. 롯데와 전병헌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만난 뒤 후원금이 지급됐다는 것이 이유다. 검찰은 롯데가 롯데홈쇼핑 재승인을 앞두고 후원금을 낸 것으로 보고 그 배경을 집중 조사 중이다.

최순실 사태로 홍역을 앓았던 삼성이 대외 기부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마련한 것도 기부 금액이 줄어드는 결과를 낳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중순부터 1000만 원 이상의 기부금 또는 후원금을 집행할 때 인사·법무·재무·커뮤니케이션팀 팀장이 참여하는 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치도록 했고, 10억 원 이상은 반드시 이사회 의결을 받도록 했다.

재계 관계자는 “그동안 올림픽 후원이나 수재의연금 등 각종 성금을 출연할 때 재계 1위인 삼성이 금액을 결정하면 다른 기업들이 재계 서열에 따라 후원 액수를 정해 왔다”면서 “삼성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후원금 규모를 줄이면 다른 대기업들도 축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정부는 티켓 판매가 예상만큼 팔리지 않자 대기업을 상대로 적극 사 달라고 요청했다. 지난 10일 ‘2018 평창동계올림픽대회 및 동계패럴림픽대회 성공을 위한 후원기업 신년 다짐회’에서 이낙연 총리는 “올림픽의 성패는 첫날 개막식(2월9일)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느냐에서 판가름 난다”며 “아직은 조금 더 갈 길이 남아있다.

큰 부담이 안 되는 범위에서 도와 달라”며 후원을 요청했다. 정부까지 나서 후원 기부금까지 낸 기업에 재차 티켓 구입을 요구했다.
일부 기업은 현 정부의 티켓 구매 요구에 부응할 경우 ‘新 정경유착’으로 비춰질 수 있어 난처한 입장이다.

그동안 재계는 국가적인 행사에 적극 협조하며 흥행을 이끌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14개 회원사는 ‘2002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197억 원의 후원금을 모았다. 개최 전 흥행이 우려됐던 ‘2012 여수 엑스포’ 역시 재계의 적극적인 협조로 성공적인 행사가 됐다는 평가도 나왔다.

대외 활동 축소 분위기 어떻게 이겨낼까

기업의 대외 활동 축소 분위기는 상당 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기업의 대외 활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한 데다 기업 내부적으로도 “돈 쓰고 욕먹는 짓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비판이 만만치 않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들도 그룹 차원의 거대 대외 조직을 두기보다 계열사별로 필요에 따라 정부와 커뮤니케이션하는 모델을 만들어 가려 한다”고 말했다.

한편 재계에선 이번을 계기로 정부와 정치권이 강요하는 준조세를 들어주지 않겠다는 기류가 확산되고 있다.

준조세는 통상 ▲국민연금과 4대 보험과 같은 기업 부담 사회보험료 ▲부담금관리기본법에 열거된 각종 부담금 ▲비자발적인 기부금 및 성금의 세 가지를 합해서 준조세라고 부른다. 평창동계올림픽 후원금, 자유무역협정(FTA) 상생기금도 대표적인 비자발적 준조세다.

한 대기업 임원은 “준조세를 잘못 냈다가 뇌물죄로 처벌 받는 전례가 발생하면 앞으로는 정부 주도의 사업에 기업들이 출연하거나 기부하는 행위가 현저하게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물론 재계가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만 뇌물죄로 엮인다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다”며 “앞으로는 정부 차원에서 진행하는 사업에 대해 지원하려면 기업들도 까다롭게 검토를 거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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