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ㅣ고정현 기자] 이재용 부회장이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나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 판결에 정치권의 이목이 집중된다. 이 부회장 항소심 판결문 곳곳에는 ‘증거가 없다’고 누차 강조돼 있다. 항소심에선 특검의 ‘스모킹건’이었던 안종범 전 수석이 작성한 ‘수첩 기록’뿐만 아니라 ‘0차 독대’와 ‘묵시적 청탁’까지 인정되지 않았다. 정유라 씨 승마 지원금 가운데 뇌물로 인정된 액수는 절반으로 줄었고 영재센터 지원금은 무죄로 판단했다. 이는 분명 박 전 대통령 재판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정치권과 법조계 관계자들은 위 판결이 박 전 대통령 재판에 큰 변수가 되진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오히려 재판부가 이 부회장을 사실상 최고 권력자에 의한 ‘피해자’로 규정함에 따라 박 전 대통령 재판이 더 불리해졌다는 게 중론으로 자리매김하는 모양새다. 3월 중순으로 예상되는 박 전 대통령 1심 선고에 정치권의 이목이 집중된다.
 

- 1심 “부도덕한 밀착 거래”→ 2심 “겁박” 朴 뇌물 액수 ‘줄고’ 책임은 ‘커져’
- 특검 ‘여론 수사’에 ‘증거재판’으로 퇴짜 놓은 법원…朴 재판에선?


서울고등법원이 5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뇌물공여 혐의에 대한 항소심 공판에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법원은 특검이 기소한 뇌물공여와 횡령, 국외 재산도피, 범죄수익 은닉 등 대부분의 혐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최대 쟁점이자 1심이 유죄판결의 근거로 삼은 묵시적 청탁과 경영권 승계 등 포괄적 현안의 존재를 부정했다.
 
특검 “뇌물 액수 213억”
법원 “72억→36억”
 

이렇듯 항소심 재판부가 1심과 전혀 다른 판결을 내리자 국민들의 이목은 자연스레 박근혜 전 대통령 선고에 집중되고 있다. 무엇보다 항소심 재판부가 특검이 ‘스모킹건’으로 제시했던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 수석이 작성한 ‘수첩 기록’마저 증거로 인정하지 않는 등 특검의 기소 내용 대부분을 인정하지 않자 특검의 무리한 기소가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재판부는 “1심 판단처럼 수첩 내용을 증거로 인정하면 전문법칙의 취지를 벗어나므로 허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전문법칙은 체험자가 직접 법원에서 구두로 보고하지 않고 서면이나 다른 사람의 진술 형식으로 법원에 전달하는 증거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법조계 관계자 역시 통화에서 “1심 재판부가 이 부회장에게 묵시적 포괄적 청탁이 있었다고 추정해 징역 5년을 선고한 데 대해 형사재판의 증거주의를 벗어났다는 비판이 있었다”라며 “특검은 이 부회장을 억지로 엮어 짜맞추기 수사로 부도덕한 정경유착의 혐의를 걸었지만, 이를 입증할 어떤 명백한 증거도 내놓지 못했다. 특검의 무리한 기소가 입증된 판결”이라고 말했다.
 
앞서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이 부회장 측이 주거나 주기로 한 뇌물 액수가 213억 원이라고 봤었다. 이 가운데 이 부회장 측이 실제로 준 돈은 77억 8735만 원이라고 봤다. 그러나 1심 법원은 72억 9427만 원을 뇌물로 인정한 데 이어 2심 법원은 36억 3484만 원만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소심 재판부가 박 전 대통령의 책임을 1심에서보다 더 명확히 했다는 점은 박 전 대통령에 악재다. 이날 재판부는 “이 사건은 최고 정치 권력자인 대통령이 최대 기업집단인 삼성을 겁박하고 측근인 최순실 씨의 그릇된 모성애로 사익을 추구한 것”이라면서 “형사법 체계는 공직부패 책임을 공여자보다 수수자인 공무원에게 무겁게 지우고 있다. 요구형 뇌물사건의 경우 공무원의 요구와 권력을 배경으로 한 직권남용을 동반할 때는 공여자보다 공무원에 대한 비난이 상대적으로 가중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이재용 부회장의 잘못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강요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이라는 뜻으로 풀이되는 대목이다.
 
뇌물액 줄어도 朴과 무관
1억 넘으면 최대 무기형

 
이를 두고 법조계는 재판부가 이 부회장의 뇌물공여죄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해서 박 전 대통령의 책임이 사라는 게 아니라는 일종의 ‘장치’를 마련해 둔 것으로 분석한다. 실제로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뇌물 수수는 범죄액이 1억 원을 넘기만 하면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대법원 양형기준을 보더라도 수뢰액이 5억 원 이상이면 기본 형량이 9~12년, 죄질이 나쁘다는 등 가중요소가 있다면 11년 이상이나 무기징역에 처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즉 박 전 대통령 입장에선 뇌물 수수액이 5억 원을 넘는 이상 액수가 줄었다는 점은 큰 의미가 없는 셈이다.
 
설상가상으로 전달된 돈의 성격이 1심 “부도덕한 밀착 거래”에서 2심 “겁박”으로 바뀐 점도 박 전 대통령에겐 불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양형기준상 ‘적극적 요구가 있는 경우’는 형을 가중하는 요소로 감안된다. 재판부는 이날 “이 전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과의 2차 단독 면담에서 호되게 질책을 당한 뒤 한 달 만에 전격적으로 용역계약이 체결됐다”며 “박 전 대통령의 질책과 요구 강도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한편 1심과 2심 결과가 크게 엇갈린 이재용 부회장의 사건은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씨 사건과 함께 최종 결론 날 가능성이 큰 것으로 관측된다. 대법원의 최고의결기관인 전원합의체는 대법원장과 12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되며 재판장은 대법원장이다. 의결은 대법관 3분의 2 이상의 출석과 출석 인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이뤄진다.
 
항소심에서 이재용 부회장이 집행유예로 풀려남에 따라 구속 시한 6개월에 구애받지 않고 대법관들은 충분한 심리를 할 수 있다.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 씨의 2심 재판이 마무리될 때까지 대법원이 이 부회장 사건을 선고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최순실 씨의 1심은 오는 13일 박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건 1심 선고는 이르면 3월 말에 내려질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통령의 2심 재판도 9월쯤에는 마무리돼 내년 초 대법원은 이 부회장은 물론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 씨 사건의 최종 판단을 함께 내릴 것으로 관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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