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 권가림 기자] 밤 11시 58분 30초. ‘운명의 날 시계’라 불리는 둠스데이 클락(Doomsday Clock)이 나타내는 시각이다. 미국 핵물리학자들은 세상이 파멸되는 시점을 ‘0시(자정)’으로 보고 매년 시카고대학 운영 이사회에서 발행하는 학회지 ‘핵과학자회보(BAS)’에 이 시계의 시각을 게재한다. 둠스데이 클락의 시간은 핵전쟁으로 인한 공포를 표상적으로 보여준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올해 북한의 핵 개발과 끊임없는 무력 도발로 인해 작년보다 30초가 앞당겨졌다. 이에 1947년 밤 11시 53분에서 출발했던 시간은 어느새 58분을 넘어가고 있다. 학자들은 핵전쟁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 시그널을 끊임없이 보낸다. 이제 인류의 파멸을 의미하는 자정까지 기껏해야 2분밖에 남지 않았다. 지구 종말 2분 30초 전, 평창 올림픽이 존재하는 지금 이 순간이다.
 
이번 평창 올림픽에선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이 북한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 12명에게 와일드카드(특별출전권)를 배정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선수 23명과 합쳐 35명의 올림픽 최초 남북 단일팀 ‘코리아’가 탄생했다. 남북 단일팀 그 자체는 올림픽 정신에 부합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올림픽 헌장 제1조에는 ‘인류 평화 유지와 인류애에 공헌하는 데 있다’며 올림픽의 핵심은 평화라고 명시돼있다. 비정치적인 스포츠 행사를 통해 갈등과 분쟁 등을 치유해 더 나은 세계를 만들자는 신조를 담고 있다.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 이번 올림픽에서 마감 기한을 넘겨 출전권을 잃은 북한 피겨스케이팅 페어조에게 와일드카드를 주기 위한 노력과 알파인 스키나 쇼트트랙 등 다른 종목에서도 참여를 유도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을 꾸리는데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서양의 개인주의보다 남북 긴장감 해소를 위한 노력이 올림픽 평화 정신에 부합한다고 판가름했기 때문이다.
 
남북 단일팀은 새로운 평화 국면의 마중물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1991년 단일팀이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평화에 대한 희망을 줬기 때문이다. 냉전 시대 사람들은 전쟁을 실제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받아들였다. 국민은 전쟁위기가 고조될 때 우유, 라면, 밀가루 등의 사재기에 나섰고 1987년 북한의 금강산댐이 서울을 침몰시키기 위해 만들어진다며 평화의 댐 만들기 모금운동에 참여했다. 실제 사람들이 전쟁을 위협으로 받아들였다는 간접적인 증거다. 이 시점에 남북 선수단이 서로 방북·방남을 하고 함께 훈련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평화에 대한 희망을 던져줬다. 이번 단일팀도 함께 경기하고 서로 응원하는 모습을 보이며 끊어진 남북 간의 길에 새바람을 불어넣었다.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하나 된 남북의 모습이 눈 앞에 펼쳐지며 북한이 단지 얼굴 빨간 전쟁 미치광이가 아닌 같은 한민족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했다. 이처럼 안전·평화가 지속될 거라는 신뢰를 주며 부정됐던 북한이 다시 긍정되는 것이 단일팀과 같은 스포츠 이벤트다.
 
물론 단일팀을 바라보는 시각이 똑같은 순 없다. 일각에선 남북 단일팀, 공동 입장, 한반도기 등의 뒷면에는 정치적 함의가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 정부는 ‘한반도 운전자론’의 추진 동력을 얻어야 했다. 북한도 연이은 핵과 미사일 도발에 국제사회에서 이뤄지고 있는 경제 옥죄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다. 반대 여론은 남북 양측이 필요조건을 충족시킬 단일팀이라는 미끼를 덥석 물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정치 쇼’로 판단하기 전에 적어도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한의 참여가 올림픽 흥행과 남북관계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는 전제가 빠지면 극단에 이를 수밖에 없다. 올림픽은 국제와 정치 부문의 그늘에 가려져 있기에 정치적 의도를 완전히 배제할 순 없다. 하지만 단일팀 구성 그 자체는 남북 교류의 돌파구를 여는 매개체임은 확실해 보인다. 이에 단일팀을 단순히 정치적인 이벤트로 평가 절하하는 것은 맞지 않다.

따라서 남북 단일팀은 일회성이 아닌 국제대회에서 계속돼야 한다. 정치적으로 이용당했다는 씁쓸한 뒷맛을 남기지 않으려면 말이다. 북한의 장웅 IOC 위원이 지난해 방한 때 ‘스포츠 위에 정치가 있다’고 말한 것처럼 스포츠가 정치와 무관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다만 이번 체육 교류로 인해 통일 분위기 조성이 기대되는 것도 정치의 스포츠에 대한 개입으로 거둘 수 있었던 성과임은 부정할 수 없다. 스포츠 교류가 동서독 통일의 밑거름이 됐고 핑퐁외교가 미국과 중국 관계를 풀어줬듯 단일팀 역시 얼어붙은 한반도를 녹일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단일팀 구성이 평화 구축과 북핵 해결에 당장 직결되지는 않겠지만 남북이 머리를 맞대고 서울과 평양을 서로 오가는 것이 ‘평화’로 나아가는 길이다. 진정한 체육 교류가 계속 이뤄진다면 오랜 분단으로 이질화돼 있는 남북 간 틈을 메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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