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정한 가해자가 따로 있는 문제 아닐 수 있어
- 한국 사회의 작동 원리에 관한 질문을 던져야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몇몇 종목경기의 파열음으로부터 다시 한 번 빙상연맹의 파벌싸움이 적폐로 지목되고 있다. 빙상연맹의 파벌다툼이 문제가 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이미 한국 쇼트트랙 선수들끼리 엉켜서 넘어진 사건을 계기로 대표팀 내 파벌싸움과 국가대표 선발전에서의 반칙 행위가 이슈 된 바 있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선 한국 이름으로는 안현수였던, 러시아인으로 귀화한 쇼트트랙 선수 빅토르안에 대한 설왕설래가 있었다. 빅토르안이 여전히 기량을 뽐내며 금메달을 획득하는 상황이 빙상연맹의 무능한 행정의 본보기로 여겨졌던 것이다.
 
전명규 부회장이
문제라고 하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빙상연맹에는 분명 문제가 있지만 그것이 그리 단순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번 동계올림픽의 불협화음 속에서 다시금 파벌 문제의 주범으로 지목된 전명규 빙상연맹 부회장의 문제만 봐도 그렇다.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팀추월 경기에서 일종의 ‘피해자’로 국민에게 각인된 노선영 선수는 전명규 빙상연맹 부회장이 이승훈, 정재원, 김보름 선수 등을 태릉선수촌이 아닌 한국체육대학교에서 따로 훈련시켰다면서 ‘차별’ 논란을 점화했다. 그리하여 전명규 부회장과 한체대 파벌이 적폐의 중심인 양 조명되었다.
 
하지만 전명규 부회장에 대한 옹호파도 있다. 전 부회장이 등장하기 전 한국 빙상계는 금전을 중심으로 돌아갔고 오히려 전 부회장이 실력 위주로 선발하는 풍토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 전 부회장의 개혁에 저항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 한체대파와 비한체대파 파벌 다툼의 시초였다고 설명한다.
 
전명규 부회장은 흥미롭게도 국정농단 사건과도 관련이 있다. 어쩌면 최순실에 의해서 불이익을 봤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빅토르안이 활약하면서 빙상연맹의 행정에 관한 논란이 커지자 박근혜 대통령은 직접 빙상연맹의 문제를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빅토르안의 부친이 전명규 부회장을 지목했기 때문에 대통령 역시 심증으로는 이미 그를 지목한 상태였던 것 같다.

그리하여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전명규 부회장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으나 징계를 할 만한 문제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전 부회장은 성과주의자이면서 개인 치부는 하지 않는 인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체부는 있는 그대로 보고했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요지부동으로 그를 징계할 것을 요구해 전 부회장은 잠시 물러나 있어야 했다고 한다. 이 시점에선 최순실이 동계올림픽의 이권을 접수하기 위해 그를 뒤로 물리려고 노력했던 것일 수도 있다.
 
전명규 부회장이 쇼트트랙과 스피드스케이팅 등 한국 빙상종목을 관리한 방식을 본다면 그의 전략은 단순한 개인의 것으로 보기 어렵다. 그는 한국 특유의 성과주의에서 최적화루트를 발견하고 그걸 냉혹하고 과단성 있게 실천한 것에 해당한다. 동계스포츠의 후발주자였던 한국은 1990년대에 쇼트트랙 부문에서부터 성과를 내기 시작한다.
 
쇼트트랙이 당시 스피드스케이팅과 핵심적으로 달랐던 부분은 기록경기가 아니라 순위경기였다는 것이다. 선수들이 엉켜 넘어지면 뒤에 따라오는 선수에게 영광이 돌아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에이스’, ‘페이스메이커’, ‘탱커’ 등을 구분하는 방식으로 팀플레이를 하여 메달을 거머쥐었다. 이후 스피드스케이팅에 추가된 팀추월이나 매스 스타트 같은 경기 역시 한국이 쇼트트랙을 통해 만들어 낸 팀전략을 활용할 수 있었던 종목이다.
 
이것은 정부가 주도하여 산업화 전략을 세우고 재벌기업을 육성한 한국의 경제성장에도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시장경제와 스포츠는 작동원리가 다르기에 차이가 생겼다. 전명규 부회장이 장악한 빙상연맹은 실력을 보고 ‘에이스’를 선발했으나 그 실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실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메달이란 성과였다.
 
한국식 산업화,
성과주의의 최적화 루트?

 
선수 개인의 입장에서도 메달을 따야 재화가 분배될 수 있었기에 그랬다. 국가대표 경기 이외의 리그가 없는 비인기종목 대부분이 그런 처지였다. 이런 상황에선 한 사람이 긴 전성기를 누리며 ‘에이스’의 자리에 오래 머무르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거듭 메달을 딴다고 연금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기에 ‘에이스’로 활약한 이후엔 후배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탱커’나 ‘페이스메이커’의 위치로 가야만 했다.
 
순위조작이니 밀어주기 같은 일들이 생겨난 맥락이다. 성과를 위해 복무하면서도 되도록 많은 이들에게 재화를 분배하려는 이 암묵적인 룰에 저항하는 이들이 있을 때 순위결정전에서의 징벌적 반칙이나 ‘왕따’ 현상이 생겼을 것이다.
 
물론 얽히고 설키다 보면 이보다 더 치졸하고 원색적인 모습도 있었겠으나, 특정한 누군가를 악마화하지 않고 영역의 작동원리와 재화 배분의 방식만을 두고 추론해도 여기까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고민을 안겨준다. 전명규가 나쁜 사람인지, 한체대 파벌이 만악의 근원인지, 아니면 숨겨진 다른 흑막이 있는 것인지에 관한 진실게임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주어진 현실이 부조리하다고 비판하기는 쉽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아예 이와 같은 종류의 팀플레이를 없애자고 말할 수도 있다.
 
팀플레이로 인해 누군가의 희생이 일어날 여지를 원천 차단하는 식이다. 사회 영역에 빗대면 제주 해군기지나 밀양 송전탑 건립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낭만적 입장에 비유할 수 있다. 또는 경제 영역에 빗댔을 때 시장 경제에 관한 자유방임주의 입장에 해당할는지도 모른다.
 
다른 방면으로는, 팀플레이 자체의 필요성은 인정하되 그렇게 희생한 이에게 적절한 보상을, 지금 수준보다 더 큰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제주 해군기지나 밀양 송전탑 문제로 갔을 때 지역 주민들에게 지금 수준보다 더 큰 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입장과 흡사하다.
 
두 입장은 모두 가능하지만, 서로 간에도 상당한 노선의 차이가 있다. 최적화 루트의 포기와 재조정으로 갈린다는 점에서 말이다. 어쩌면 한국에서 진보주의를 말하는 이들은 이 상이한 두 갈래 대안을 포괄하기에 계속해서 삐걱대게 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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