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양극화로 인한 갈등 이슈, 정치 세력 과제는 ‘사회통합’
사회적 연대 구축 리더십, 보수·진보 진영 공통 과제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 70년간 한국 정치는 이념과 지역이라는 씨줄과 날줄이 만든 함수관계를 토대로 형성된 주도 세력들의 부침의 연속이었다. 해방후 좌·우파 대결이 있었지만 한국전쟁을 거치고 권위주의 체제가 들어서면서 진보 진영이 설 공간은 사라졌다.
 
이후 반공과 경제 발전이라는 국가목표 아래 군부 리더십의 권력화와 보수 정치세력의 내부 헤게모니 경쟁이 40여 년 이어졌고, 98년 첫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지면서 비로소 여야의 정권 경쟁시대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 진보세력이 제도권으로 진입하는 흐름도 있었다. 해방과 함께 한반도를 뒤흔든 첫 번째 정치적 변화는 분단과 군정이었다.
 
일본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우리 민족은 자주독립국가 건설의 꿈에 부풀어 있었지만 38선을 경계로 남북을 각각 나눠 미국과 구 소련이 주둔하는 형태의 군정이 과도기 정치 체제로 굳어졌다.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裕仁) 일왕의 항복 선언 4시간 전인 오전 8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가 중도 좌파 지도자인 여운형과 만나 행정 기구를 넘기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이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 결성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국제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미 군정이 들어서면서 건준은 해방공간에서 위상을 인정받지 못했고 권력의 진공상태 속에서 각종 이념과 노선을 추종하는 정치세력이 충돌했다.
 
남로당계를 핵심으로 하는 박헌영 등 좌익 계열부터 김성수·송진우 등을 주축으로 하는 한국민주당계 우(右)파, 여기에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이끈 김구와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 등 해외파까지 가세했던 것이다.
 
이어 1948년 8월 남한에서 반공과 자유주의를 내세운 우파 이승만정부가 탄생하고, 그해 9월 북한에서는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이 공산정권을 수립하면서 남북분단시대의 주도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 전쟁 기간 동족상잔의 이념대결 후유증으로 남한에서는 의미있는 정치 집단으로서 좌파는 80년대까지 사실상 소멸됐다.
 
특히 1959년 이승만 정부에서 있었던 진보당 당수 조봉암에 대한 간첩 혐의 적용 및 사형 집행, 진보당 해산이라는 초유의 사건은 남한에서 좌파에 대한 사형 선고이기도 했다. 하지만 1960년 이승만의 장기 통치를 위한 3선 개헌과 3·15 부정선거는 시민혁명인 4·19로 이어졌고, 민주화 열기를 담은 시민 세력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는 듯했다.
 
그러나 4·19로 태동한 시민사회는 이듬해 박정희 당시 제2군 사령부 부사령관이 주도한 5·16 쿠데타로 만개하지 못한 채 그 자리를 군부에 내줘야 했다. 이후 군사독재 리더십으로 비롯된 정치적 권위주의 체제는 전두환·노태우 정부까지 이어졌고 영남을 지역적 기반으로 하는 보수 진영이 권력을 공고하게 장악한 시대였다.
 
다만 민주주의 억압이라는 대가로 진행된 압축적 근대화 과정은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독재체제에 대한 반대집단으로서 민주화 세력을 잉태했다. 1979년 10월 26일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이른바 10·26사건에 이어 전두환 신군부의 12·12 쿠데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로 이어지는 격변의 공간에서 억눌린 민주화 욕구가 분출했다.
 
80년 ‘서울의 봄’으로 지칭되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김영삼·김대중을 양대 축으로 하는 민주화 세력은 제도권 정치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며 ‘양김(金) 시대’를 열었다. 다만 양김의 주도권 다툼은 영호남을 가르는 현재의 지역 구도를 형성했다.
 
80년대 민주화 운동과정에 주목할 점 중 하나는 재야와, ‘386세대’라고 불리는 학생운동권의 세력화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1990년대를 거쳐 2000년 이후 제도권으로 대거 이동하며 보수우파가 장악한 한국 정치권에 이념적 좌파층을 형성하며 진보 진영의 진지를 구축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며 분출한 6월 민주항쟁은 전두환 군사독재를 종식시켰으나 과도 체제로서 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졌다. 양김의 후보단일화 실패가 노태우 정부 탄생의 1등 공신이었다. 이어 1990년 연초의 민정·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을 계기로 영남과 충청권의 보수세력이 한국정치 전면에 나서게 됐고, 1993년 2월 김영삼 문민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1997년 12월 대선에서는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손잡고 ‘DJP연대’를 통해 대선에서 승리, 해방 후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교체가 완성됐다. 그 결과 만년 야당세력이 집권세력으로 탈바꿈하는 정치지형의 대개편이 뒤따랐다.
 
이 같은 정치세력의 교체는 2002년 대선에서 당시 노무현 후보가 당선돼 정권 재창출로 이어지면서 가일층 확대됐다. 당시 노 후보는 이른바 ‘노사모’로 지칭됐던, 정치적으로 의식화하고 집단적으로 행동하는 자발적 대중을 정치 공간으로 끌어들었으며 이는 정치영역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 곳곳에서 세력교체로 이어졌다.
 
‘10년 정부’를 이어간 옛 야당인 민주당 뿌리의 정치세력은 2007년 대선에서 보수진영에 터잡은 한나라당에 다시 정권을 내주면서 정치권력·세력 지형은 재편됐고, 보수 성향의 이명박 박근혜 정부로 이어졌다.
 
‘두 차례의 정권교체’ 와중에서 70년대 싹이 잘린 이념적 진보 진영이 제도권으로 진출하는 흐름이 생겨났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진보정당을 표방한 민주노동당의 의회 진입은 진보세력이 현실 정치 공간에서 독자영역을 구축한 첫 케이스였고, 2012년 19대 총선에서 진보정당인 통합진보당이 제3당으로 도약하는 발판이 됐다.
 
다만 2014년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에 대해 북한의 대남혁명노선을 추종한다는 이유로 헌정사상 초유의 정당해산 결정을 내린 후 진보정치세력은 급속도로 위축됐다.
 
경기대 송하성 교수(한국공공정책학회 회장)는 “군부독재와 5·16, 서울의 봄 등이 해방 이후 국내 정치 공간을 가르는 변곡점의 역할을 했다”며 “양김 시대를 거치고 90년대에 들어서며 현재의 지역구도가 완성됐고, 2004년 민주노동당이나 열린우리당의 등장이 일정한 한계를 보여주긴 했지만 진보세력의 정치세력화로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1997년 대선의 첫 정권교체를 기점으로 해방 이후 수십년간 고착화돼 있던 여야 구도는 허물어졌고, 정권을 둘러싼 정치 세력 간 경쟁시대가 열리면서 새로운 과제도 함께 부상했다. 시기적으로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성장의 그림자인 양극화로 인한 갈등 이슈가 갈수록 부상하는 상황에서 향후 정치세력의 과제는 사회통합으로 모아졌기 때문이다.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이뤄가면서도, 고통분담에 기반을 둔 사회적 연대를 구축하는 리더십을 어떻게 주도할 것인지가 이제 보수·진보 정치 진영의 공통 과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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