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지난 2월21일 전립선암·뇌수종·파킨슨병 등 합병증으로 별세했다. 향년 99세였다. 그는 1918년 미국 남부 노스 캐럴라이너 주에서 농부의 4자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 빌리에게 매일 성서를 읽도록 권유했으나 역사서적을 탐독했고 야구를 즐기며 선수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16세 때 목사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 성직자의 길로 나서기로 했다. ‘플로리다 성서학교(현재 트리니 대학)‘를 졸업한 뒤 일리노이 주에 있는 신학대학 ‘휘튼 칼리지’를 거쳐 1943년 목사로서 설교단에 서기 시작했다.
그레이엄 목사의 설교는 말을 짧게 끊어가며 청중의 뇌리에 쉽게 와 닿게 했고 공격적이었다. 이미 1957년 그는 뉴욕의 ‘매디슨 그퀘어 가든’ 등에서 16주간 부흥회를 가졌고 거기엔 200만명이 참가했다. 그는 종교 설교자로서는 최초로 라디오를 비롯한 대중매체를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미국의 목사’로 우뚝 섰고 해리 트루만으로부터 버락 오바마에 이르기까지 역대 대통령들이 그를 현인(賢人)으로 숭앙했다. 30권의 책도 썼다. 
그의 설교는 외국에도 폭발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66년 영국 런던에서 설교집회를 열었을 때 100만 명이 운집했다. 1995년 푸에토리코에서 전도집회를 가졌을 때는 48개 외국어로 동시통역되었고 위성으로 185개 국가들에 생중계되었다. 그는 우리나라에도 1952년, 58년 방문, 복음집회를 가졌으며 1973년 서울 여의도 광장 집회에는 100여만 군중이 모여들었다. 5월30일~6월3일 사이 연인원 320만 명이 운집했다. 그의 전도로 한국 개신교회는 400% 성장했다는 말도 있다. 
그레이엄 목사는 소련도 방문했다. 그는 러시아 교회들을 둘러본 뒤 소련에는 종교탄압이 없다고 단정, 미국인들의 분노를 터트리기도 했다. 그는 1992년 김일성 북한 주석의 초청으로 평양에도 갔다. 김일성은 기독교 집안 출신으로 그레이엄 목사를 내심 흠모했던 것 같다. 김은 그레이엄 목사가 소련을 방문하고 소련에 종교 탄압이 없다고 공언하는 등 자기를 초청한 공산정권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 것을 이용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레이엄 목사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고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기독교 복음주의를 역설하였다. 특히 그는 동서 냉전시대 자유민주체제 와 공산독재 지배로 분단된 동서독에 관심이 많았다. 서독을 자주 방문했다. 그는 서독 방문을 비정치적이라면서도 “십자군 출정”이라고 했고 무신론 소련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서독의 재무장을 시사했다. 그는 “마틴 루터의 땅인 독일은 미국형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기독교 복음주의로 가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1954년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그레이엄의 설교 목적은 인간 영혼을 신으로 인도하기보다는 공산주의로부터 구해내려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동독 관영매체들은 그레이엄을 “심리적 냉전의 미국 선전 도구”라고 비난했다. 
그레이엄 목사는 반공주의자였고 자본주의 신봉자였는데도 소련도 김일성도 그를 정중히 초청하지 않으면 아니될 정도로 전 인류의 선망 대상이었다. 그를 “개신교의 교황”이라고도 한다. 그가 기독교 지도자로서 신망이 그토록 두터울 수 있었던 데는 단지 그의 감동적인 설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깨끗한 사생활도 크게 작용했다. 그는 모든 기부금을 오직 복음 전파에만 쓰이도록 했고 모든 회계장부를 투명하게 공개했다. 일부 종교 지도자들은 유명세를 타게 되면 신도들과의 지저분한 성추문과 검은 돈 문제로 파괴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깨끗했다. 빌리 그레이엄은 잡음 많은 한국 종교계가 사부(師父)로 삼아야 할 20세기의 위대한 종교 지도자였다. 그의 명복을 빈다.


■ 본면의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