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압박하는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 폐지될까

<뉴시스>
[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 지난해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사실 폭로로 시작한 ‘미투 운동’이 연극, 문화, 대학, 의료계 등을 돌아 정치권의 심장인 여의도 국회에 상륙했다. 지난 5일에는 안희정 충남지사의 수행비서 성폭행 사건이 터지면서 정치권은 물론 국민들을 충격에 빠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날 국회에서도 첫 번째 ‘미투’ 사례가 공개되면서 국회가 발칵 뒤집혔다. 이어 정봉주 전 의원도 성추행 의혹이 제기되자 그야말로 한국 사회가 미투의 쓰나미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문제는 성폭력 사례 공개 속도를 사회 시스템이 따라가지 못하면서 발생하고 있다.

미국·독일·프랑스 등 선진국 형사처벌규정 두지 않아
한국은 명예훼손 시 2년 이하 징역, 금고 또는 500만 원 이하 벌금

‘강경한 정부’ 추행죄 징역 5년 이하, 벌금 3000만 원 이하
업무상 위계·위력 간음죄 징역 10년 이하, 벌금 5000만 원 이하


매일같이 쏟아지는 성폭력 사건들은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우리 사회 구성원인 여성들의 고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오랫동안 만연돼 온 각종 성폭력 사례 공개 운동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이 단순한 공개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게 시민단체 등의 의견이다. 이번 미투 운동을 계기로 그동안 문제가 돼 온 각종 사회 시스템과 법률 등을 개선하고 바꿔야 한다는 얘기다.

성폭력 공개 
망설이는 피해자들 


미투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형법상 사실 적시 명예훼손 폐지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사실 적시 명예훼손으로 성폭력 피해자들의 2차 3차 피해가 우려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해자들이 이 조항을 이용해 피해자들의 성폭력 공개를 차단하기 위해 사용할 여지가 많은 점도 문제가 되고 있다.  

명예훼손의 기본적 법률 원리는 진실이든 허위든 사실을 적시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경우 민형사상 책임을 지우는 것이다. ‘형법’상 명예훼손죄에는 기본적으로 제307조에 규정된 일반 명예훼손과 제309조에 규정된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이 있다.

일반 명예훼손의 경우 제307조 제1항은 ‘공연히 사실을 적시하여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제307조 제2항의 경우 ‘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해 허위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을 가중처벌하고 있다. 

한마디로 사실을 말해도 처벌될 수 있다는 의미다. 소송을 당할 경우 발언의 진실성이나 공익성을 공표자가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문제는 공익성을 인정받고도 처벌되는 경우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미투 피해자들이 명예훼손죄 때문에 피해사실 밝히기를 꺼리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한다. 

형법개정안 국회서 발의
통과 가능성은?


지난 8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이 최근 열풍이 불고 있는 미투운동과 관련해 일명 ‘형법 일부개정법률안(미투피해자보호법)’을 대표 발의했다.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 처벌 대상에서 자신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말하는 경우를 제외해 피해자들의 미투운동 참여를 돕기 위함이다. 

진 의원은 “최근 사회 전반에 성폭력 피해자들의 미투운동이 확산되고 있지만 현행법상 그 내용이 사실이어도 가해자에 대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성립할 수 있어 피해자들의 고백을 위축시킨다는 비판이 있어 왔다”며 “실제로 피해자가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할 경우 긴 기간 동안 재판을 거쳐야 하고 그 과정에서 피해사실을 반복적으로 진술해야 해 2차 피해를 입는 사례가 빈번했다”고 지적했다.

개정안은 구체적으로 직장 내 성희롱 피해사실에 관한 경우, 성폭력 범죄 피해사실에 관한 경우, 아동청소년대상 성범죄 피해사실에 관한 경우를 제외했다. 

진 의원은 “말 못하고 있을 피해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피해사실을 당당하게 밝힐 수 있는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며 “국가는 국민을 범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만큼, 우리 국회가 피해자들의 인권을 보호할 수 있는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의정활동을 펼칠 것”이라고 밝혔다.

명예훼손죄 처벌에 대한 논의는 국회서 예전부터 있었다. 지난 2013년에는 당시 민주당 소속의 유승희 의원이 형법상 명예훼손죄를 삭제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유 의원은 2013년 9월 2일 국회서 ‘표현의 자유 보장 연속 공청회’를 열어 명예훼손죄 폐지를 주장했다. 공청회에서 유 의원은 “유럽안보협력 기구에서는 1997년 이후 회원국 중 약 15개국이 형법전에서 명예훼손을 완전 삭제했다. 

그러면서 유 의원은 “우리나라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모욕죄, 후보자비방죄 등 허위사실 공표 없이도 형사처벌을 할 수 있는 조항들을 존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허위사실 및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와 후보자에 대한 허위사실공표죄 등에 대해서는 5년 또는 7년 이하의 징역 등 가혹한 형벌을 규정하고 있다”고 국내 현황을 전했다. 

당시 유 의원은 형법상 명예에 관한 죄로 기소된 인원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도 지적을 했다. 개선책으로 유 의원은 “명예훼손을 대다수의 선진국처럼 전면적으로 비형사범죄화(형사처벌하지 않고 당사자간 민사소송으로 해결토록 함)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형법상 사실적시 및 허위사실 명예훼손, 사자 명예훼손,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모욕죄 등 관련조항을 전면 삭제하고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죄와 공직선거법상 후보자비방죄, 허위사실공표죄에 대한 형사처벌조항을 삭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성돈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상당수 선진국도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형사 처벌하는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며 “유엔 자유권 규약위원회도 2015년 이래 한국에 관련 규정 폐지를 권고해왔다”고 말했다. 

정부 “2·3차 피해 막겠다”
사건 처리기준·법정형 강화


정부에서도 미투운동이 확산되면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어지자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나섰다.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은 지난 8일 ‘직장 및 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근절 대책’ 합동 브리핑에서 “실명으로 ‘미투 운동’에 참여한 피해자에게 2차 피해가 가지 않도록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이고 즉각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정 장관은 ‘피해자 보호 및 2차 피해 방지’에 대해 추가 설명을 했다. 정 장관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무고죄를 이용한 가해자의 협박, 손해배상 등에 대한 민·형사상 무료법률 지원을 강화”를 약속하며 “상담과정에서 피해자의 해고, 불이익 처분 등 2차 피해 확인 시 적극 경찰에 수사 의뢰”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미성년자인 성폭력 피해자의 경우 민사상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 시효를 성인이 될 때까지 유예하도록 민법 개정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수사과정에서 피해자 신분노출 등 2차 피해 방지를 위해서는 가명조서를 적극 활용토록 하기로 했다. 또 지방경찰청·경찰서에 미투 피해자 보호관 915명을 둬 수사가 끝날 때까지 책임지고 피해자 사후 지원 하기로 했다.

정 장관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경우 수사과정에서 위법성 조각사유를 적극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소 피해를 보지 않게 하겠다는 의미다. 

정부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정부비서 성폭력 사건처럼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난행을 저지르는 범죄자에 대한 사건처리 기준을 강화하기로 했다. 종속관계 정도, 반복성, 범행결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다. 

발표에 따르면 정부는 업무상 위계, 위력 간음죄의 법정형을 징역 10년 이하, 벌금 5000만 원 이하로, 추행죄의 법정형을 징역 5년 이하, 벌금 3000만 원 이하로 각각 상향하는 방안을 검토한다. 

법정형을 상향하는 경우 공소시효도 업무상 위계·위력 간음죄의 경우 현행 7년에서 10년으로, 업무상 위계·위력 추행죄의 경우 현행 5년에서 7년으로 각 연장된다.

현행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은 징역 5년 이하, 벌금 1500만원 이하, 추행 징역 2년 이하, 벌금 500만원 이하에 처해진다. 

한편 정부는 피해자에 대한 온라인상 악성 댓글에 대해서는 사이버수사 등 엄정 대응한다. 경찰은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 보복은 가중 처벌된다는 사실을 강력히 경고하고, 피해자·신고자에 대한 체계적 신변보호를 추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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