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핵·로켓 개발로 국제사회 고립 자초…3대 세습 뒷받침
비효율적 계획경제 고수 경제난 야기…체제 위해 인권탄압

 
2015년 9월 16일 북한(北韓)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당의 70년 역사(歷史)를 돌아보며 당(黨)을 향해 ‘위대한 어머니’라고 소리쳤다. 북한 매체는 이처럼 김일성 주석부터 3대(代)로 이어지는 최고지도자에게 ‘어버이’ 수식어를 붙이는 반면 노동당에 대해서는 ‘어머니’라는 수식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자애로움’이 연상되는 어머니에 대한 비유와 달리 노동당의 뿌리에 놓인 것은 잔혹한 권력 투쟁이다. 북한 노동당의 70년 역사는 1인(人)지배 체제 강화의 역사인 것이다. 김일성이 해방 이후 박헌영이 주도한 국내파, 김두봉·무정·최창익 중심의 연안파, 그리고 한때 자신과 함께했던 갑산파 등 다른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를 숙청하는 과정이 해방 직후부터 노동당의 역사를 관통한다.
 
당 중심 사회인 북한에서 노동당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쥔 김일성이 1인 지배 체제를 강화하고 3대에 걸쳐 권력이 세습되는 과정의 단계마다 핵심적인 위치에 자리했다. 북한이 당 창건일로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 것은 해방으로부터 불과 두달 뒤인 1945년 10월 10일이다. 이날부터 나흘간 평양에서는 ‘조선공산당 북조선 5도당원 및 열성자대회’가 열리고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구성된다. 바로 이날이 지금까지도 북한이 기념하는 노동당 창건일이다.
 
이후 ‘북조선분국’은 같은 해 12월 제3차 중앙확대집행위원회를 개최하는데, 이 행사에서 김일성이 ‘책임비서’로 선출되면서 대내외적으로 명실상부한 당내 1인자로 떠오르게 된다. 이듬해 8월에는 김일성이 이끄는 ‘북조선분국’과 김두봉이 주도하는 ‘조선신민당’이 합쳐서 ‘북조선 노동당’(북로당)을 결성한다.
 
북한이 선거를 거쳐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이로부터 2년 뒤인 1948년 9월 9일이다. 정부 출범과 함께 김일성이 수상에 취임한다. 이어 1949년 6월 사실상 북로당이 남로당을 흡수하는 형식으로 남북 로동당이 ‘조선로동당’으로 합당하고, 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에 김일성이 앉는다.
 
이듬해 북한이 시작한 비극적인 한국전쟁은 도리어 김일성의 권력 강화에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이는 전쟁의 참혹한 ‘실패’에 대한 책임을 당내 라이벌에게 떠넘기는 방식으로 가능했다. 한국전쟁 중의 무정 철직을 시작으로 1953년에는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계열 핵심 인물들이 감금되거나 재판에 넘겨진다. 이어 1956년에는 윤공흠의 김일성 비판으로 촉발된 ‘8월 전원회의 사건’(8월 종파 사건)이 벌어지면서 연안계 인사들이 축출된다.
 
이런 흐름은 1958년 3월 노동당 제1차 대표자회에서 김일성이 한 ‘종파 청산 선언’으로 마무리되는데, 바로 이 시점이 당내 김일성의 절대 권력이 확립된 시점으로 평가된다. 이어진 1960년대는 김일성 절대 권력이 당을 넘어 전 사회적으로 제도화, 전면화하는 시기로 평가된다. 이 과정에서 김일성이 자신의 뜻에 배치되는 정책을 주장하는 당대 간부들을 처단한 것이 바로 1967년의 ‘갑산파 숙청’ 사건이다.
 
‘유일지도체계’가 확립되자 노동당의 관심은 자연스레 후계자 문제로 쏠린다. 1972년 말부터 진행된 당증교환사업을 통해 반유일사상 제거를 기층 차원으로 확대하는 데 성공한 노동당은 1973년에는 김정일을 비서국 조직·선전담당 비서로 선임한다. 이후 김정일은 1974년 2월에 열린 노동당 제5기 제8차 전원회의에서 당내 핵심 권력기구인 중앙위원회 위원이 된다.
 
이로써 서른 두살의 나이에 확고한 후계자 자리에 오른 김정일에게 당시 북한 매체가 부여한 호칭은 다름 아닌 ‘당중앙’이었다. 북한 노동당 역사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독재 세습체제 구축 과정이었다.
 
김정일의 후계자 김정은은 김정일 사망 이듬해인 2012년 열린 제4차 당 대표자회에서 새 직제인 당 제1비서에 추대, 사실상 김정일의 노동당 수장 직을 승계했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북한은 김정일을 ‘영원한 노동당 총비서’로 추대했다.
 
70년 노동당 역사 중에서 초기 4년을 제외한 66년간 김씨 일가의 차지였던 셈이다. 북한도 노동당을 “김일성·김정일 동지의 당”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히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같은 성격과 역할 때문에 노동당은 항상 북한 권력과 정책의 중심에 서 있다.
 
특히 1970년대 중반 김정일 후계체제 때부터 구축해 놓은 전당·전군·전사회에 대한 노동당의 강력한 통제 시스템은 권력기반이 허약한 김정은 정권을 떠받드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 정치적 경험과 기반 없이 갑작스레 2009년 후계자에 이어 2011년 최고지도자에 오른 김정은은 선대 김정일이 만들어 놓은 노동당 시스템에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안정적으로 자신의 통치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당이 유일지배의 작동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고 ‘최고지도자=노동당’이라는 등식이 만들어지면서 북한 정권이 추진한 모든 정책의 실패의 근원이 되고 있다. 특히 김일성이 만들어 놓은 ‘주체’의 도그마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경제는 피폐되고 군사적 도발과 인권 문제로 국제사회의 제재와 고립을 면치 못하고 있다.
 
김일성의 ‘경제·국방 병진노선’은 김정일의 ‘선군노선’으로, 김정은의 ‘경제·핵무력 병진노선’으로 이어지면서 자위적 억제력 구축이라는 명분 아래 핵과 장거리 미사일 개발 등 국방분야에 막대한 재정을 쏟아붓는 이유가 되고 있다.
 
또 중국, 러시아, 동유럽 및 아시아 사회주의 국가들의 개혁개방에도 북한은 여전히 중앙집권식 계획경제 시스템을 고수하면서 1990년대 중후반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하는 최악의 경제난을 겪어야만 했다. 이는 북한 주민들의 탈북 사태를 초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물론 김정은 체제 들어 시장경제 논리에 따른 다양한 경제개혁 조치로 경제성장을 이루려고 안간힘을 쓰고는 있지만 핵과 미사일 개발을 용납하지 않는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에 막혀 탈출구를 못찾고 있는 형국이다.
 
이같은 북한의 정치, 경제, 외교적 비합리적 정책은 주민들의 저항과 비판을 막기 위한 인권침해의 근원이 되기도 했다. 체제와 정책에 순응하지 않으면 숙청하고 정치범수용소에 가둠으로써 체제의 일체성을 유지해간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권 유린 행태는 결국 국제사회의 주목과 압박을 받으면서 북한 체제를 옥죄는 또하나의 요소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경기도 대변인을 지낸 이우철 한국공공정책학회 전문연구위원은 “북한 역사는 노동당의 역사로 등치시킬 수 있다”며 “무오류성에 근거한 노동당의 유일 지배체제가 외교적 고립과 경제적 비효율 구조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이 전문연구위원은 “김정은 체제 들어서 기능과 권한이 강화되는 노동당이 이런 문제들을 얼마나 잘 풀어나갈 수 있느냐가 북한의 미래와 연결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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