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강타한 ‘미투’ 운동, 남성들도 성 피해 고발 움직임
직장·학교 등서 “나도 당했다” 꼬리 무는 남성들의 ‘미투’ 고백
男, 사회통념상 고발 어려워…“남녀 함께 성차별 구조 철폐해야”
‘남자도 미투해도 되나요’, ‘남자인 저도 적어봅니다’, ‘남자들도 미투의 보호 대상이 되는지’. 이는 최근 익명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인 블라인드에 올라온 미투 관련 게시글 제목이다. 해당 SNS는 미투 게시판이 따로 있을 만큼 성 피해 사실 고백이 매일 끊이지 않는다. 여성들에게서만 활발할 줄 알았던 미투 움직임이 남성들 사이에서도 확산되는 분위기다.
성폭력 피해 남성들
“주변에 털어놓기 어려워”
지난달 2일 블라인드에 올라온 글에 따르면 한 남성은 어릴 적 운동을 하다 젊은 여자 강사에게 노골적인 신체 접촉을 당했다. 이 남성은 “다른 피해 사례를 읽고 가해자들의 파렴치한 생각과 행동에 열 받아 글을 올리게 됐다”며 “당시 어린 나이엔 창피하고 부끄러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기분이 나쁘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12일에는 한 남성이 과거 직장 상사와 함께 간 술집에서 이 상사가 자리에 있던 다른 여성에게 자신의 몸을 일부러 만지게 하는 등 성추행을 겪었다며 글을 올리기도 했다.
미투 운동이 본격적으로 불거진 지난달부터는 블라인드에 “직장 내 여자 상사가 자꾸 엉덩이를 만진다”는 식의 비슷한 성추행 고발 글이 줄을 잇고 있다. 한 남성은 “여자친구와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냐고 묻는데 이 질문을 여성들이 받았다면 무조건 성희롱 발언 아니겠냐”며 “도저히 창피해서 누구한테도 이야기를 못 하겠다”고 전했다.
이달 10일에는 대구의 한 대학교 페이스북 페이지에 7년 전 남자고등학교에서 겪은 성폭력을 폭로하는 글도 게재돼 논란이 일었다. 남성인 글쓴이는 당시 동급인 남학생들에게 지속적인 성적 학대를 당했다며 혐오스러웠던 그 시간이 매우 힘들었음을 고백했다.
그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많은 남성 피해자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미투 운동의 목적은 ‘펜스룰(Pence Rule·직장의 업무나 회식 등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현상)’처럼 남성과 여성 간 장벽을 만드는 게 아니다. 미투는 성폭력을 겪은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자신의 견해를 남겼다. 서지현 검사의 미투 이후 수많은 여성들이 언론과 SNS를 통해 미투 운동에 동참하자 이처럼 남성들도 침묵을 깨고 이 운동에 함께하고 있다.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여성들의 미투에 비해 남성들의 미투 고백은 현저히 적은 것이 사실이다. 대검찰청에서 발행한 2016년도 범죄분석 자료를 보면 당해 성폭력 피해자 건수는 총 2만9357건으로 이중 여성이 2만6116건(89%)이었고 남성은 1478건(5%)에 불과했다. 이렇듯 남성에 대한 성폭력 피해 건수는 공식적으로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피해 사실을 선뜻 고백하지 못하고 있는 남성들이 많아 실제 피해 건수는 더 클 것으로 분석된다. 2016년 여성가족부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성폭력을 당한 사람 중 ‘그 사실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은 전체의 37.9%였다. 이 가운데 여성은 48.1%가 성폭력 피해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린 반면, 남성은 14%에 그쳤다.
또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지난해 남녀 근로자 3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최근 6개월 이내 성폭력 피해를 경험했다’고 답한 남성 근로자는 25.0%에 달했다. 이들은 직장 상사에게 본인을 성적 대상으로 삼는 음담패설, 부부 및 연인관계에 대한 성적 질문, 성적인 관계 강요 등의 피해를 입고 있다고 했다. 특히 남성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 대부분(85.4%)이 동성인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줬다.
결국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은폐될 확률이 여성보다는 남성이 더 높은 셈이다. 이는 남성들이 성 피해를 겪어도 주변에서 대수롭지 않아 하거나, 또 여성만을 성폭력 대상으로 보는 사회통념이 강하기 때문이다.
미투 운동 본질은 무엇?
익명을 요구한 직장인 A(32)씨는 “대학생 때 서울의 대형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같이 일하던 당시 40대 정도 돼 보이는 아주머니가 ‘나와 자봤으면 좋겠다’는 말을 주변 사람들 있는 곳에서 스스럼없이 했다. 그때 기분이 너무 나빠서 CS 담당자에게 이 얘길 했더니 ‘잘못 들은 거 아니냐’고 하더라. 나만 이상한 X 될 것 같아 그냥 묻었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누리꾼들도 이 같은 의견에 동의한다. ‘남자가 고백하면 그런 걸로 미투 한다고 욕먹기 십상’이라는 데 공감 댓글이 수십 개 달렸다. 한 누리꾼은 “너도 좋았지 않냐, 남자가 돼서 왜 그러느냐 등 남성 피해자에게는 꼭 그런 시선이 존재한다”고 했다.
또 다른 누리꾼은 “물론 여성들도 고백하기 어렵지만 남성들은 더 그렇다. 피해 남성은 같은 편인 남성들에게조차 자신을 이해받지 못한다. 남성 피해자도 말할 수 있는 사회가 진정한 양성평등의 사회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남성 피해자들이 여성 피해자에 비해 나서서 미투하지 못하는 이유로 사회 곳곳에 만연한 성차별적 인식 및 구조가 이유라고 지적한다.
국가인권위원회 관계자는 “여성이 피해자인 성폭력 사건의 경우 오랜 시간 축적된 성차별 구조 탓에 여성 피해자는 자기파괴적인 경향을 더 보이게 된다”면서 “대체로 성폭력 사건은 남녀 모두에 권력 관계가 작용하는 비슷한 양상이지만 남녀의 인식 차이로 여성들이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결과가 나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또 “미투 운동은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 인식 및 구조가 본질적인 문제”라며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남성들도 미투, 위드유(#With You·당신과 함께하겠습니다)를 외쳐 한국사회에 축적된 성차별 구조를 깨부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은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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