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ㅣ고정현 기자] ‘비둘기’가 떠난 자리를 ‘매’가 꿰찼다. 대북 온건파 틸러슨 미 국무부 장관이 경질된 자리에 대북 강경파인 마이크 폼페이오 국장이 내정됐다.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북미 정상회담까지 예정돼 있다. ‘왜 하필 이 시점인가’ 라는 물음표가 따라 붙을 수밖에 없다. 남북·북미 정상회담이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절호의 기회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갑작스런 인사(人事)경질은 국내 정치권의 우려를 키우고 있다. ‘정상회담을 한다’는 것 외엔 지금까지 확정된 게 아무것도 없다. 회담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이다. 매파가 득세한 미국이 북한의 제안이 탐탁지 않을 경우 강경 목소리를 드러낼 것은 자명하다. 이번 북미 정상회담이 군사 행동전 미국의 마지막 노력일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첫 북미 정상회담이라는 의미론적 수사에 취해 ‘안이한 낙관’이 계속된다면 대화와 해결의 장이 파국의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 “美 군사 행동 전 마지막 외교 가능성...” 北 ‘진정성’ 여부 관건
- 北, ‘비핵화 합의→파기’ 수 차례 반복… 찜찜한 ‘북한의 흑역사’

 
남북 간 유화 국면이 조성되고 있는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을 전격 경질했다. 외교로 북핵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해 트럼프 행정부에서 대표적 ‘비둘기파’로 불리던 틸러슨 장관을 밀어낸 자리에는 대북 강경파 마이크 폼페이오 중앙정보국(CIA)국장이 내정됐다.
 
폼페이오, 트럼프의 ‘예스맨’
한국 외교부 ‘패싱론’ 심화 우려
 

마이크 폼페이오 국장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예스맨’으로 불린다. 직설적인 성격과 강경한 안보관으로 유명하다. 미국 내 대표적인 대북 강경론자이자 원조 매파로 꼽힌다. 그는 과거 북한의 정권 교체를 해법으로 언급할 정도로 북한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보여 온 인물이다. 그는 지난 11일 미국 폭스뉴스와 인터뷰에서도 북한과 정상회담을 하는 자체만으로 뭔가를 양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그는 “북한을 제재하고 압박하면서 대화와 협상 과정을 지켜볼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위원장은 핵 실험을 중단하고 지난 몇 년 동안 해 온 미사일 실험을 멈춰야 한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필요한 군사적 훈련을 계속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비핵화 논의를 탁자 위에 올리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이 대화의 조건으로 도발 중단과 비핵화를 언급한 것과 달리 핵·미사일 실험 중단과 비핵화를 조건 없이 실행하라고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이처럼 “북한과 만나 날씨얘기라도 하자”던 대북 온건파인 틸러슨과 180도 다른 ‘매파’ 폼페이오 CIA 국장의 내정 소식이 전해지자 우리 정부는 “향후 남북 정상회담이나 북미 정상회담에 미치는 영향은 없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한 언론사와의 통화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정책과 구상을 펼치려고 하는 인사일 것”이라며 “중요한 것은 북미대화를 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확고한 의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틸러슨 경질 사태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는 우리 정부와는 달리 대북·외교 전문가들 대다수는 우려를 감추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당장 한국 외교부 패싱론이 불거진 상황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손발을 맞춰 온 틸러슨 장관이 강판됨에 따라 향후 북핵 해법 마련 과정에서 외교부의 입지가 더 좁아질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새해 들어 남북관계, 북미관계가 급격히 변해가는 과정에서 존재감이 없다는 비판을 계속 받아 온 데 이어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서 미국 측 카운터파트까지 바뀌었기 때문이다. 강 장관은 당장 16일 틸러슨 장관을 만날 예정이었으나 대신 존 설리번 국무장관 대행과 마주하게 됐다.
 
강 장관은 “급작스러운 변화”라면서도 ‘향후 한미 간 조율에 문제가 없겠느냐’는 질문에는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청와대와 백악관, 트럼프의 복심인 폼페이오 내정자가 향후 북핵 문제를 주도할 경우 외교부 소외론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회담 실패 시 ‘추락’...
한국 절박한 상황에 놓여”

 
설상가상으로 미국 내 다수의 전문가들은 이번 정상회담이 실패할 경우 그 어느 때보다 전쟁의 위험성이 커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빅터 차 미국 국내전략문제연구소 한국 석좌는 “북미 정상회담이 오랜 시간 지속된 북한과 분쟁을 끊어 낼 기회도 될 수 있다”면서도 “만일 트럼프가 김 위원장의 제안이 탐탁지 않을 경우 전쟁 직전에 내몰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버드대학교 케네디스쿨의 코리아워킹그룹의 디렉터 존 박도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며 “그동안 북한과 정상회담은 마치 산 정상에 오른 뒤 다른 한쪽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았다. 이번 북미 정상회담은 아주 높은 산꼭대기에 도달한 것과 같다. 실패한다면 추락이다”라고 비유했다.
 
이 같은 우려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박지광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북한과의 평화적 대화를 바라는 한국 정부와 달리, 트럼프는 이 회담을 군사 행동을 하기 전 마지막 외교적 시도로 간주하고 있는 것 같다”며 “한국은 틸러슨 경질의 여파를 파악하고 이에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였다”고 밝혔다.
 
특히 박 연구위원이 이날 발표한 ‘대북 군사행동 관련 미국 여론 조사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내 여론은 ‘외교적 노력이 모두 실패했을 때 북한에 대한 군사행동에 찬성한다(43.7%)’는 의견이 ‘반대한다(26.7%)’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속한 공화당 지지층 사이에서는 70.1%가 찬성해 반대(8.9%)를 압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정상회담 성사 자체는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그만큼 리스크도 크다는 분석이다.
 
조사는 지난해 12월 미국의 여론조사전문기관(YouGov)를 통해 미국 전역에 사는 성인 남녀 1000명을 상대로 진행했다. (표본오차 ±3.5%포인트, 95% 신뢰수준) 북핵 위기를 다루는 트럼프의 능력에 대해서는 59.6%가 불안하다(신뢰한다 30.6%)고 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현재 트럼프 외교안보팀은 ‘매파’가 득세하는 상황이다. 존 켈리 백악관 비서실장,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폼페이오 국무장관 지명자 등 외교안보팀이 모두 군 출신이다. 이는 북·미 정상회담에서 북핵 문제가 미국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을 경우 더욱 강력한 압박은 물론 군사옵션까지 꺼내 들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음을 뜻한다.
 
상황이 이쯤 되자 다수의 전문가들은 이번 정상회담에서만큼은 북한이 과거와 달리 진정성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북한은 국제 관계에서의 협약을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일방적으로 파기해 온 흑역사의 주인공이다.
 
당장 지난 2005년 북한은 9·19합의를 통해 핵 포기와 핵확산금지조약·국제원자력기구 복귀를 공약했지만 1년 만에 핵실험을 실시하기도 했다. 북한의 갑작스런 대화 공세가 대북제재에 따른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시간 벌기일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생겨나는 것도 이 대목이다.
 
일단 북한의 진정성 여부는 북미 정상회담에 앞서 열리는 4월 남북 정상회담의 합의 내용으로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여기에서 긍정적인 결과가 도출되지 않는다면 역사적인 첫 북미 정상회담도 순조롭게 진행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즉 북·미 정상회담 이후 미국 정부가 ‘군사 옵션’이라는 최악의 카드를 꺼내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남북 정상회담의 성공이 전제돼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잘 알고 있을 우리 정부는 남북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문제를 핵심 의제로 설정하고, 이어지는 북미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평화를 견인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4월 말 열리는 남북회담에서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다짐받고, 5월 예정된 북미정상회담에서 본격적인 비핵화 방법론을 구체화한다는 복안이다.
 
北·美 간 신뢰 부족한 상황...
평양·워싱턴보다 ‘판문점’ 유력

 
한편 역사상 첫 북미정상회담이 가시권에 들어오면서 역시 역사적 장소로 기록될 회담 장소를 놓고도 다양한 아이디어가 쏟아지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핵문제와 한반도 평화체제 등을 논의할 것으로 예상되는 북미정상회담은 어디에서 열리느냐에 따라 회담 분위기와 결과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우선 일반적인 정상회담 관례에 따라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워싱턴DC나 평양에서 만날 가능성이 거론된다. 라즈 샤 백악관 부대변인은 11일(현지시간) 북미정상회담 장소와 관련, “현재는 발표할 게 없다. 시간과 장소는 앞으로 결정될 것”이라면서 “어떤 것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며 백악관이 될 가능성을 시사했다.
 
샤 부대변인은 트럼프 대통령이 평양을 찾는 방안에 대해서도 “그것은 매우 그럴듯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그러나 배제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다만 수교를 맺지 않고 적대관계를 이어온 북미관계가 일반적인 국가 대 국가의 관계와는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김 위원장이나 트럼프 대통령이 워싱턴이나 평양으로 날아간다면 자칫 회담도 시작하기 전에 상대방에게 굽히고 들어가는 모양새로 비칠 수 있다.
 
이에 6·25전쟁 정전협정을 체결하고 한반도 분단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판문점이 유력 후보지로 꼽힌다. 김 위원장이 4월말 남북정상회담 때 찾을 예정이고, 트럼프 대통령이 작년 방한 때 방문을 추진했던 판문점은 북미 간 신뢰가 여전히 부족한 상황에서 정치적·역사적 상징성과 함께 경호 측면에서도 최적이라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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